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깍지 낀 손을 얼마나 부여잡았는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진 박사는 수 시간째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마인들과의 결전을 앞두고 강박증이 다시 도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는 단지 기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장에 함께 가는 건 심약한 그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딱히 도와줄 것도 없었다.
모든 장비를 지원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자신의 연구소에 홀로 앉아 헌터들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비이.
기도에 몰입한 진 박사에게 낯익은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몇 마리의 ‘비’가 작은 쪽지 하나를 들고 진 박사를 찾아온 것이다.
“이건……!”
진 박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천해선이나 강정현의 ‘비’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진 쪽지를 급하게 풀어 보았다.
곧 그의 눈꺼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진 박사님. 오랜만이야. 박사님 소식은 종종 전해 들었어. 마음 착한 해선이가 박사님을 잘 보살펴 줬던데? 하하.>
쪽지를 확인한 진 박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박사님이라면 단번에 내 상태를 알아볼 거라 생각했어. 난 지금 쫌…… 많이 안 좋거든. 박사님은 어떻게든 나를 되돌리려고 하겠지만, 나는 되돌아갈 생각이 없어. 돌아가 봐야 할 것도 없고.>
“키릴…….”
진 박사는 탄식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난 이제 지쳤어. 더 이상 차원 너머의 적들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아. 마침 아주 좋은 후계자도 찾았고.>
오늘 싸움에서 우리가 진다면 이 쪽지는 필요가 없겠지. 저승에서 이야기하면 될 테니까. 하하.>
하지만 박사님. 만약 우리가 이기면 더 이상 숨지 말고 양지에 나와서 살아. 당당하게. 내 죽음이 슬프다면 내 몫까지 2인분으로 살아 달라는 말이야.>
쪽지 위로 굵은 물방울 두어 개가 떨어져 내렸다.
박사님과 함께 헌터 시험을 봤을 때. 죽은 동료들과 던전을 뛰어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남들이 욕할 때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다들 죽어 버려서 유언을 남길 사람이 진 박사뿐이네. 하하.>
반대로 날 기억해 줄 사람도 얼마 없겠더군. 가끔은 날 떠올리며 욕해 줘. 함께 있는 시간 동안 행복했어. 나중에 만나.>
쪽지 말미에는 그녀가 남긴 립스틱 자국이 있었다.
참으로 그녀다운 인사라 할 수 있었다.
진 박사는 눈물범벅이 된 채 키릴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고생 많았다.”
눈물이 완전히 말라 버린 이후에도 한참 동안.
진 박사는 손가락으로 립스틱 자국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 * *
“이제 알았어.”
퀴스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못됐던 거야.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었는데.”
퀴스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해야 했던 건…… 바로 저거겠지.”
천해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크고 어두운 구름이 여전히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마계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한 퀴스케는, 더 이상 하나의 개체로 볼 수 없었다.
그가 마력을 삼킨 것이든, 마력에 삼켜진 것이든 격파해야 하는 대상은 분명했다.
하늘에 떠 있는 암흑 물질 전체.
천해선은 그것을 박살 낼 계획이었다.
이번만큼은 퀴스케가 천해선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목소리가 아닌, 날카롭게 벼린 메루스를 통해서.
파바박.
그러나 천해선의 움직임은 퀴스케가 출수한 메루스보다 훨씬 빨랐다.
좀 전까지 눈으로도 따라잡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천해선은 몸을 솟구친 뒤 두 번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높이, 더 높이 검은 구름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스스스스…….
그건 ‘독보’를 이용한 스카이워크가 아니었다.
천해선의 주변에 떠돌던 바람이 그를 저 높은 곳까지 올려다 주었다.
자신이 바람을 다루는 것인지, 바람이 그를 도와주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해 보였다.
빠드득.
퀴스케가 표독스러운 얼굴을 한 채 몸을 솟구쳐 올렸다.
천해선의 말은 백 프로 정답이었다.
아무리 퀴스케에게 타격을 입혀 봤자, 하늘에 있는 검은 구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암흑 물질과 퀴스케가 연결되어 있는 한, 그는 끊임없이 재생과 회복을 반복할 수 있었다.
한 세계의 힘을 전부 소진시킬 때까지.
고오오오오…….
커다란 구름 안에 두 명의 초월적 존재가 있었다.
퀴스케가 말한 것처럼 ‘껍데기’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초의 종’으로서, 누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스스스스…….
이상한 건, 천해선에게서 어떠한 ‘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예전처럼 눈부신 에테르도, 위협적인 블랙 에테르도, 금빛 메루스도, 불길한 암흑 물질도 없었다.
천해선은 처음 퀴스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퀴스케를 보며 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의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자연’ 자체가 된 느낌이었다.
스스스스…….
별로 강할 것도 없는 바람이 구름을 빠르게 걷어 내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면 구름이 이동하고 흩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
그러나 지금 흩어지는 구름의 성분을 감안하면, 천해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딜!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퀴스케가 갖가지 쐐기를 만들어 날렸다.
일부는 금빛, 일부는 거무튀튀한 색을 지녔다.
마인의 껍데기를 가지고 메루스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천부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능이라면 천해선도 퀴스케 못지않았다.
심지어, 그 안에는 키릴이라는 또 하나의 재능이 숨 쉬고 있었다.
스스스스…….
그다지 강한 바람도 아니거늘, 퀴스케의 에너지가 모래바람처럼 부스러졌다.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구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옅게 변해 갔다.
퀴스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세’라는 것을 경험했다.
-흐아아아악!
화염과 전격, 물과 빙결이 천해선을 향해 쏟아진다.
그러나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메루스조차 무용지물일진대, 그런 특정 에너지가 먹힐 리 없었다.
천해선의 몸이 닿기도 전에 화염이 수그러들고, 얼음은 녹아 없어졌다.
-안 돼……!!
퀴스케의 다급한 눈이 이곳저곳을 향한다.
분명히 마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거늘.
한 명의 인간에게 그 모든 에너지가 상쇄된다는 말인가.
퀴스케는 주변에 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구름을 급격히 흡수했다.
곧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리수를 두는구나.’
천해선은 무심한 얼굴로 퀴스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지금 퀴스케가 하려는 건 마인의 각성 단계, 즉 ‘엑스키’였다.
어린 소년의 이마에 뿔이 돋아나고, 좌우로 커다란 날개가 형성되었다.
넘치는 힘에 퀴스케는 적잖이 만족한 듯 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에너지를 날리는 대신, 직접 날개를 퍼덕여 천해선에게 접근했다.
쾅!!!!!
기세 좋게 날아가던 퀴스케의 몸이 거꾸로 뒤집혔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인중을 쓰다듬었다.
마인의 검은 피가 번들번들 묻어 나왔다.
-어떻게……?
퀴스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딱히 천해선이 취한 동작이 없었는데, 출혈이 나올 만한 상처가 생긴 것이다.
쾅!!!!!
이번에는 뒤통수에,
쾅!!!
다음에는 옆구리에.
이해할 수 없는 가공할 충격이 퀴스케의 전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망치로 이곳저곳을 후려치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대기를 상대로 싸움을 걸 수는 없을 테지.’
천해선은 스스로의 힘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 상태의 힘을 잠시 빌린 것뿐.
퀴스케의 몸을 난도질하는 것은 순수한 대기의 힘이었고, 그래서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피조물 중에서 자연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쾅!!!
-크아아아악!!
자연은 그 힘의 한계가 없고, 언제까지라는 개념도 없다.
그렇기에 퀴스케의 강인한 몸을 끊임없이 유린할 수 있었다.
반짝.
마침내 어두운 구름이 점점 옅어지고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밤새 이어진 혈전 끝에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이 밝아져 올수록, 퀴스케의 얼굴빛은 점점 흑색이 되어 갔다.
-@#$@#$
급기야 퀴스케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마 저것이 퀴스케가 막 마인으로 태동할 무렵 배웠던 언어일 것이다.
“스스로 태초의 종 어쩌고 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껍데기에 매몰된 모습이었다.
퀴스케가 엑스키 상태가 될 때부터 천해선은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의 승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갖가지 형태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또 한 명의 ‘태초의 종’, 키릴의 힘까지 손에 넣었다.
종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된 천해선은 글자 그대로 불사의 영역에 도달한 상태였다.
-*&^%
소년을 닮았던 마인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으직.
우두둑.
대기에 짓눌려 몸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피조물만이 있을 뿐.
스스스스스…….
천해선에게는 평화롭게 들리는 바람 소리가 퀴스케에게는 죽음의 진혼곡처럼 들렸다.
“가족은 그런 식으로 얻는 게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그 무엇으로도 자르지 못했던 퀴스케의 몸이 산산이 찢겨져 폭사해 버렸다.
펑!!!!!!!!
퀴스케의 몸이 약해서가 아니다.
하늘에 떠 있던 암흑 물질이 모두 흩어져 나온 결과였다.
길고도 길었던 마계와의 싸움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키릴……. 해냈어요.’
공중에 뜬 상태로 천해선은 키릴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 전에 본 흉한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천해선의 마음속에서 키릴이 웃고 있었다.
스스스…….
마인과의 싸움은 끝났다.
모든 에너지를 흡수한 천해선의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지탱해 주던 바람도 어쩐 일인지 천해선의 몸을 지탱해 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천해선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해선!!”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그를 향한다.
그러나 천해선은 눈을 감은 채 거꾸로 추락할 뿐이었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천해선을 바라볼 때, 호기로운 울음소리가 천지에 울려 퍼졌다.
-쿠왕!!!!!!!
콧김을 내뿜으며 호기롭게 포효하는 검은색 드래곤.
녀석이 천해선의 몸을 낚아챈 뒤 배를 힘껏 내밀었다.
* * *
“에…… 그래서…… 그러니까…….”
번쩍이는 플래시와 셔터음.
장기간 길드의 대표와 총재직을 담당한 사일리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소였다.
“그래설라무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일리아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갓댐!!! 몰라!! 모른다고!”
“예, 예?”
“모른다니까? 천해선이 어디 있는지 나도 몰라!”
사일리아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아무리 인류를 구한 영웅이라고 한들, 다 같이 싼 똥(?)을 함께 치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천해선은 ‘자신의 모든 행정적 권한과 책임을 사일리아에게 위임한다’는 말만 남긴 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일리아는 굉장히 무책임한 처사라며 천해선을 맹비난했지만, 놀랍게도 천해선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길드는커녕 ‘이레귤러’라는 소규모 집단 하나만 이끌어 온 헌터가 아닌가.
‘글로리 길드’의 실질적 주인이라고는 하나 그것도 명목상 정수민이 대표로 취임한 상태였다.
천해선은 그가 일으킨 바람처럼(……) 아주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인물이었다.
“천해선의 실종되었다면…… 인류의 크나큰 위기가 아닙니까?”
“어이 당신.”
사일리아가 기자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마계와 전투를 치른 게 고작 일주일 전이야. 위기니 뭐니 그딴 소리 하고 싶어? 진짜 인생의 위기가 뭔지 각인시켜 줘?”
“죄…… 죄송합니다.”
사일리아의 높은 콧날 아래로 뜨거운 김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말이 나왔으니 확실하게 말하지. 이계와 마계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여전히 위협은 존재한다. 다른 세계에서 ‘태초의 종’이 언제 다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헌터 육성을 소홀히 해서는 곤란해.”
스스로 격전을 치른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만, 사일리아의 시선은 어느새 그다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리더의 참된 자세라 말할 수 있었다.
씨익.
반대편에서 기자 회견을 지켜보고 있던 잉센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그의 반대편 손에는 커다란 책 한 권이 들려져 있었다.
* * *
“정말…… 이상한 사람들 아니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될 법해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계량한복을 입은 말총머리의 인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못 믿겠으면 돌아가든가.”
“아이 참.”
옆에 있던 소심해 보이는 남자가 다급히 그를 제지한다.
“아저씨가 강조한 거 잊었어요? 서비스 정신……!!”
“개나 줘라.”
말총머리는 콧방귀를 뀐 뒤 봉고차 운전대에 올랐다.
덕분에 소녀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둡게 변했다.
“저기……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거참 이 아가씨 의심만 많아 가지고…….”
이번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이봐 학생. 이름이 뭐야?”
“나현…… 이에요.”
“그래 나현이. 동생이 지금 많이 아프다 그랬지? 정신 오염에 빠져서.”
“네에…….”
동생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현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래서 우리 클린업 농장에 편지를 쓴 거고. 맞아?”
“네에…….”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아니, 아무리 우리가 쉰 지 삼 년이 넘었다지만 어떻게 우리를 몰라볼 수가 있지? 내 참 자존심 상해서 직접 말할 수도 없고…….”
“언니가…… 누군데요……?”
나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지만 붉은 머리칼의 미녀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언능 타기나 해. 다녀와서 동생 치료해 주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네에.”
“그리고 오죽 절박했으니 이러겠냐마는……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수상해 보이는 차에 타면 안 돼. 알았어?”
지들도 수상한 봉고차를 끌고 온 주제에, 그녀는 소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네에…….”
부아앙.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이 TV에 나올 때에는, 소녀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를 때였다.
왜 정신 오염 같은 중병을 치료해 주는 데 돈이 필요하지 않은 걸까?
그리고 농장의 이름이 왜 ‘클린업’인 걸까.
마냥 자신이 학생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다 왔다. 내리자.”
소심한 인상의 사내가 쭈뼛쭈뼛하면서 소녀를 안내했다.
봉고에서 내릴 때 잡아 준 팔의 반대쪽에는, 신기해 보이는 천이 동동 감겨 있었다.
“야! 손님 받아! 으악! 여기 소똥 안 치운 새끼 누구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붉은 머리칼의 미녀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밭을 가로지르며 저리 난리 칠 거면 하이힐은 왜 신고 다니는 걸까.
소녀가 품은 의문은 굉장히 타당한 것이었다.
“어서 와요. 학생.”
곧 비닐하우스 안에서 호리호리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무표정할 때는 조금 날카로워 보였지만, 그가 짓는 웃음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연예인?’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런 추측을 해 보았다.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인물들이 하나같이 선남선녀들이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나온 청년도 청년이지만, 그 뒤로 나온 두 명의 여인도 눈이 번쩍 뜨일 수준의 미녀들이었다.
그냥 바라만 봐도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하하하. 잘 오셨습니다.”
털이 수북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현 씨라고 했지요? 너무 걱정 말아요. 제 가족도 오래 병마와 싸웠지만, 결국은 이겨 냈답니다?”
“어후. 저 인위적인 말투는 삼 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냐.”
하이힐에 묻은 진흙과 비료를 털어 내며 요염한 얼굴의 여인이 투덜거렸다.
신기한 건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얼마 전에 새로 핀 꽃이 하나 있어요. 곧 가져올 테니 기다려요.”
청년이 부리나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작은 화분을 꺼내 왔다.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청년이 들고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반짝.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특이한 잎을 가진 꽃 한 송이가 빼꼼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사실 꽃을 처음 본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오색찬란한 꽃잎.
그건 청년이 차고 있는 팔찌처럼 아름다운 광채를 두르고 있었다.
“예쁘죠? 이 꽃의 이름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
봄날의 따스한 태양과 한가한 바람이 그들 모두를 감싸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