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44)
러스트 [RUST]-944
자폭장치가 가동되지 않았고 따로 매설된 폭탄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로이 스턴을 부대를 뒤로 뺐다.
정신계에 당한 것도 아니라면, 정말 놈들이 거점을 포기하고 떠났다는 건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로이 스턴의 경험상 적이 이유 없는 행동을 할 때가 제일 위험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로이 스턴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작전 목표인 끝나버렸다. 그래서 끝인가?
선택지는 두 가지.
적들이 떠나 텅 빈 거점을 작전 성공으로 삼고 멈춘다.
아니면 놈들을 추격해 섬멸한다.
처음으로 단독 지휘권을 얻었는데 이대로 끝나야 하나?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했고 놈들의 전력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최소한 놈들의 전력은 확인한다.’
변이 괴수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버려진 거점 인근에 진지가 세워졌고, 기갑병과 노심 아머로 구성된 추격대가 적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
4월이지만 아직도 영하 날씨인지라 6m~7m 높이로 얼어붙은 눈과 얼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했다.
쉼 없이 터졌던 화산이 멎은 지 오래였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쉽사리 식지 않고 있었다.
노심 아머가 기동하는 데는 별문제 없어도 5m 크기의 강철 인형이 움직이기엔 여러모로 위험한 환경이었다.
그렇다고 기갑병을 뺀다면? 전신 갑옷 크기의 노심 아머로는 변이 괴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로이 스턴은 거대한 썰매를 만들어 기갑병을 눕혀 얼음 위로 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수색대를 더 멀리 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추적했을까. 적이 남긴 흔적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지도위에 펼쳐진 적의 이동 경로를 보면 크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원형 궤도로 계속 간다면 적들은 자신들의 거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열흘이라면 이쪽이 떠나리라 생각했나?
10일 동안 자리를 피했는데도 이쪽이 거점에 붙어있다면 싸울 생각일까?
어쨌건 적의 이동패턴을 찾았으니 매복할 기회였다.
‧
적들은 예상대로 멀리 돌아서 거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건 로이 스턴의 부대가 매복에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변이 괴수를 주력으로 운용하는 적들이지만, 최고위 식인귀나 흡혈귀가 없으리라 단정하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주력으로 삼은 것은 변종 곰이었다. 얼핏 봐도 몸길이가 6~7m는 될 법한 곰이니, 두 발로 서면 9m 가까이 될 법했다.
일어섰을 때의 크기만 비교하자면, 기갑병보다 거의 2배 가깝게 큰 덩치였음에도 두려워하는 자는 없었다.
저 정도 크기의 곰 괴수라면 캐나다 북방에서 지겹게 싸워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별 소용 없다는 건 첫 번째 격돌에서 나타났다.
쿵!
거대한 방패가 곰의 일격을 막아내는 소리.
기갑병 하나가 방패로 막고 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양옆에서 창과 로켓포로 타격하는 방법이었다.
슥-
앞발로 방패를 타격한 곰이 태클하듯 방패를 붙잡고 몸을 비틀었다. 육중한 몸무게와 강력한 완력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려 쓰러졌다.
쓰러진 기갑병의 머리통을 순식간에 분리한 괴수를 향해 로켓포를 쏘자, 바닥에 쓰러진 기갑병의 몸통을 방패로 삼아 막는 곰.
흐엉-
대괴수용 창을 위빙으로 피한 곰이 창대 안쪽으로 파고들어 태클했다. 그리고 물 흐르듯 이어진 마운트 자세.
로이 스턴은 HUD(Head-Up Display)에 떠오른 교전 영상을 믿을 수 없었다. 머리가 똑똑해진 변이 괴수가 인간이 파 놓은 함정을 알아채고 역 공격하는 건 있었어도. 이런 방식으로 싸운 적은 없었다.
‘변이 괴수를 조종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놈들이 조종하는 곰들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부분부분 능동반응 장갑이 달린 갑옷. 대전차 미사일을 사용한 첫 공격이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루탄을 터뜨려 변이 곰의 시각과 후각을 마비시킨 틈을 타, 뒤로 빠진 기갑병 부대를 추격하지 않는 적들이었다.
후퇴하는 적을 공략하는 건 기본인데 어째서?
적은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
잠시 뒤, 투구에 백기를 매단 곰 괴수와 한 사람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어이- 이야기 좀 하지.”
‧
‧
‧
교토와 오사카 중간쯤 위치한 거점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생존자 그룹을 보게 된 마루였다.
‘······.’
화산재와 먼지 때문에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인간은 바퀴벌레 이상으로 질겼고 능력은 신비에 가까웠다.
“거기. 숨어계신 분.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식인귀나 흡혈귀들이라면 모를까 인간 생존자가 은신을 알아채다니. 리퍼 슈트의 은신 기능이 이렇게 쉽게 간파되는 것인가 싶었다.
은신을 해제하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루의 모습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남자였다.
“으. 은신 능력자이십니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마루를 향해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사내가 처음과는 달리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으로 모시세요. 그분이 우릴 해코지하려고 했다면 피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실례했습니다. 안으로 오시죠.”
반경 50m가량 되는 투명한 반구는 방어막이라기보다 필터에 가까웠다. 물리적 방어 능력은 없지만, 화산재와 먼지를 걸러주는 역할.
“예? 독가스는 모르겠지만, 화재 매연 같은 건 걸러졌습니다.”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남자였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발현되는 각성은 종말의 환경에서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단이 됐다. 문제는 놈들의 거점이 가까운 곳에 생존자 그룹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부분이 거슬렸기에 초대에 응했던 건데···.
마루의 날카로운 감각에 걸린 여자, 반투명 필터의 중심에 있는 여자는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블라디마루 칼린 국왕 맞으시죠?”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떻게?
“누군가 배신한 건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스르릉-
마루가 뉴클립스를 뽑자, 주변에 있던 생존자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으히힉- 으엇-하는 소리를 지르며 다람쥐처럼 물러서는 자들.
‘뭔 이런 병신들이.’
대재난이 터지고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일본은 전국시대나 마찬가지 개판이 됐고. 그런 아수라장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자들이 이딴 병신들이라고···.
그럴 리 없었다.
가능성 없지만, 이들의 모습이 진짜라면 누군가 이들을 보호해줬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럴 수 있었다.
쯧-
마루는 뽑았던 뉴클립스를 다시 검집에 넣었다. 피를 보지 않고 다시 넣어서 그런지, 잠시 웅- 떠는 뉴클립스.
“그건 아닙니다.”
인간들 데리고 소꿉장난하느냐는 마루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여자였다. 마루는 리퍼 슈트의 헬멧을 벗었다.
지배력을 쓰거나 정신계를 쓰면 그걸로 끝. 아니라고 해도 여자의 머리를 가져갈 생각인 마루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전 계약했습니다.”
“계약?”
“네. 제 능력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저 또한 대가를 받기로 한 것이죠.”
필터 같은 능력을 써주고 변이 괴수와 약탈자에게서 보호해주는 대가로 헌혈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당신이 원하는 게 뭔가요?”
“내가 원하는 것이라.”
“우리를 죽이는 게 목적입니까? 안전과 생존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여자의 이야기에 마루가 픽 웃었다. 죽음이 기운이 밴 웃음이었다.
안전과 생존이라. 그걸 이 년이 어떻게 알았지?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기순이 놈들에게 잡혔다는 것.
“기순이를 건드렸냐?”
“아니요. 그분이 먼저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아- 씹-
마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기순이 새끼 뭔가 조마조마하더니 뭔 짓을 한 거야.’
“그래서?”
“안전과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우리도 여러 파벌이 있습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파벌. 인간은 그저 가축일 뿐이라는 세력. 인간과 공존해야 한다는 집단을 비롯해 여러 계파가 있었다.
신세계를 만들자며 뭉쳤던 그들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와 대재난. 그리고 예상을 벗어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파벌이 갈렸다는 이야기.
새로운 질서라는 큰 틀은 합의했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있는 파벌은 사람들과 계약하자는 쪽입니다. 귀족은 단순히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영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지요.”
“아- 그래?”
개나 고양이도 사람처럼 키우는 세상이었는데, 인간들과 계약 놀이하는 식인귀, 흡혈귀가 있다고 해서 놀랄 건 없었다.
마루의 이죽거림을 알아챘는지 여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각 세력과 개인이 개별적으로 움직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중요 거점을 공격받았으니, 공동 대응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본래는 그랬어야 하는데, 기순이 중간에 개입했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받지 않는다면 신성 왕국은 굳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현재 신성 왕국이 실효지배하는 영역이 공격받지 않는다면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
일본과 필리핀에 있는 싱크홀, 불사의 괴물을 공략하려고 한 것도. 그것들을 그냥 두면 신성 왕국의 생존과 안전에 위험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신성 왕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신성 왕국도 대응할 이유가 없다는 기순의 설명에 신세계 의회에서는 일단 대화를 결정했다.
“대화? 너희들이?”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친구분께서 목숨을 걸고 만든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자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돌렸다.
기순이 이 새끼. 진짜-
그냥 확 쳐버릴까?
마루의 손이 슬며시 뉴클립스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 이야길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절 죽이신다면 저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 능력이 사라지면 저들은 화산재와 먼지 속에서 질식해 죽을 텐데요. 신성 왕국에서 저들을 보호해주실 건가요? 이곳 말고도 다섯 군데가 더 있습니다.”
“······.”
이제까지 자신을 지켜준 여자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뒤로 빠져 있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짓을 보니 이 여자 흡혈귀가 지배력을 쓰거나 세뇌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저런 놈들이 있는 곳이 다섯 곳이나 더 있다고?”
“네.”
“그래서 무슨 대화를 하겠다는 건데?”
“신성 왕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새로운 질서에 합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적대하는 행위는 앞으로 없을 겁니다. 만약 적대하는 신인류가 있다면 그건 우리와는 상관없는 자입니다.”
말은 좋네. 분탕질을 시켜 놓고 ‘그놈은 우리와 상관없는 놈이다.’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개소리였지만 마루는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싱크홀과 불사의 괴물 연구는 당분간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
“신성 왕국이 우주로 거점을 옮긴 뒤에 하겠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신성 왕국의 그늘에 있는 한국에서 손을 떼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이 동남아에 진출하는데도?”
“네. 경제는 경제니까요.”
“···신성 왕국 화폐가 기축 통화로 사용될 텐데?”
“기축 통화를 하나만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
야생 개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거미들도 준동할 터. 변이 괴수까지 생각하면 이들과 끝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건 좋지 않았다.
“너흴 어떻게 믿지?”
“친구분이 인질을 교환하자고 하셨습니다.”
뭐?
“친구분께서 자발적으로 인질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야- 기순이가 자발적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정신계에 당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진짜 죽고 싶냐?”
“이곳으로 오기로 했으니 직접 확인해 보세요.”
“기순이가 여기로 온다고?”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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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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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미쳤냐? 놈들이랑 틀어졌으면 어쩌려고?”
낮게 깔린 마루의 목소리에 기순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미안이고 자시고. 아- 씹- 홋카이도 거점 공략하러 간 부대는 어떡하고?”
“그쪽도 피해는 없을 거다.”
“아니. 무슨···. 하- 대체 뭔 생각이냐?”
피해가 없을 거라는 말은 그쪽도 이야기해놨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