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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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도의 법원 앞에 선 에밀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되어서야 덴카르트의 이름을 버리게 되는구나…….’
손에 든, 미리 준비한 이혼 서류를 응시하던 그녀가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여전한 사내야.’
알렉시스 덴카르트는 세월에 머리가 희게 변한 그녀와 달리 여전히 번듯해 보였다.
눈가와 입매의 희미한 주름이나, 약간의 새치를 제외하면 그녀가 사랑하던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시스 덴카르트가 품의 회중시계를 계속 꺼내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보좌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혼 말고도 더 중대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하기야,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급한 볼일이 생겼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렉시스가 떠났다.
에밀리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알렉시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대답을 듣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언제나 무관심이구나.’
차라리 그 여자를 죽이게 만든 자신을 원망했다면, 그게 아니라면 미안해하기라도 했다면…….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대화로 풀으면 풀었지 이런 식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더는 늦지 않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그때, 장식용 수풀에서 작은 얼굴이 빼꼼 나왔다.
“…….”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
수풀에서 나온 아이의 얼굴에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가장 증오하던 소년의 얼굴이 섞여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이도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히 웃었다.
묘한 감상이 들었다.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둘 다 저런 표정을 짓진 않았었다.
그래, 시종인 척 살아온 그 소녀가 그런 얼굴이긴 했었지만…….
이윽고 예상치 못한 인사가 들렸다.
“와. 할머니다!”
“…….”
“할머니, 안녕하세요!!”
에밀리의 서늘한 표정에도 아이는 계속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알렉시스가 이 아이를 찾으러 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잠시만 버티면 되겠지.
“그래. 네가 에단이로구나.”
얘기는 익히 들었다.
아무리 변방에 갔다 해도 덴카르트의 새로운 얼굴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할머니라.
예전에는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단어인데, 세월이 지나도 한참은 지난 모양이다.
그 사실에 에밀리는 씁쓸함보단 담담함이 들었다. 이제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이유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저, 할머니 초상화에서만 봐서 아쉬웠어요. 할머니, 아픈 건 이제 나으신 거예요?”
에드릭이 아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둘러댔는지 짐작이 되었다.
아파서 요양한다는 핑계 정도겠지.
하여, 괜찮다고 둘러댄 에밀리도 화제를 능숙히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에드릭의 생일이구나. 에드릭의 생일 선물은 준비했니?”
“네! 그림을 그려왔어요.”
“그 애가 많이 좋아하겠구나.”
“보실래요?”
솔직히 보기 싫었다.
하지만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에밀리는 오늘 이 황성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처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자수보다도 아이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고아원 봉사를 다닐 때는 꼭 그렇게 아이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곤 했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핀잔을 들어도 그랬었다.
그땐, 정말 아무런 고민이 없이 행복했는데.
어쩐지 서글퍼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에밀리는 이내 추스르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렴.”
아이는 품에서 꼬깃꼬깃 접은 도화지를 꺼내 펴놨다.
그 안에 아이치곤 꽤 잘 그려진 에드릭의 웃는 얼굴과 꽃잎이 도화지에 이상하게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이건 손재주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에밀리는 잘한 부분에 대해선 칭찬을 해주었다.
“그림은 잘 그렸구나.”
“헤헤. 그렇죠. 저,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이것도 따로 준비했어요.”
“…….”
“어머니가 반지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거라고 하셨어요.”
새하얀 꽃잎을 가진 꽃으로 만든 반지는 그림보단 엉성했으나, 그녀의 추억을 다시금 자극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좋아하던 꽃이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영지에 내려갔을 때부터 정성껏 관리하던.
“이건 할머니 드릴게요.”
……나를, 왜?
멍하니 바라보자, 어느덧 손가락에 반지를 껴 준 에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겐 특별한 힘이 있거든요. 할머니가 제 사랑을 받고 더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에단 덴카르트.”
“할아버지!”
뒤에서 들리는 부름에 에단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쪼르르 달려가서 너른 품에 덥석 안겼다.
에밀리는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그 고고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아이를 안고 있었다.
“혼나야지. 네가 사라졌다고 로벨리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치만,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에단.”
손주를 안고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매를 접는 알렉시스를 보며 에밀리는 차게 웃었다.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그 불쾌한 기색을 읽었는지, 알렉시스의 낯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들어가지.”
“그 전에 잠깐만요.”
“……?”
“아가야. 에단이라고 했지.”
“네!”
알렉시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에밀리가 눈짓으로 에단을 불렀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다루어온 에밀리에게 이 정도는 손쉬웠다.
금방 에밀리에게 달려간 에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너는 바른 어른으로 자라고 싶니?”
“네! 아버지, 어머니처럼 바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쩌렁쩌렁한 답에 황실 법원을 지나던 이들이 그들을 흘끗흘끗 응시했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아버지, 어머니는 바르긴 하지. 그러니 네 할아버지만 멀리하면 완벽하겠구나.”
“에밀리.”
“알아요. 더 말할 생각은 없답니다.”
에밀리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법원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무언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할머니.”
“…….”
“다음에 에단 생일에는 다 낫고 오셔야 해요. 약속하신 거예요. 아셨죠?”
에밀리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거절은 없었다.
***
“여보, 생일 축하해!”
양손 가득 선물 가방을 들고 현관에 들어서던 에드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도로 간 김에 로벨이 좋아하는 선물이나 사와야겠다 싶어서 잔뜩 사왔는데……. 자신의 생일이었다.
눈치를 보니 자신만 몰랐던 것 같다. 어색하게 웃자, 로벨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도 선물 가방을 가져가 주었다.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든 채 후, 초를 분 에드릭이 말했다.
“이번에도 잊어서 미안.”
“왜 자기가 미안해?”
로벨은 그의 뺨에 생크림을 묻히며 웃었다.
“자기도 내가 잊는 건 다 챙겨주잖아. 생일 정도야 앞으로도 내가 잊지 않고 챙겨주면 되지.”
“저도 있어요!”
에드릭은 다리를 꼭 잡으며 말하는 에단을 보며 웃고 말았다.
‘정말 로벨을 쏙 닮았다니까.’
생긴 건 자신을 닮았는데, 하는 짓을 보면 정말 로벨 같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이닝 룸으로 향하려는데, 에단이 그의 재킷 끝자락을 잡았다.
“아버지,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어요.”
“……내 허락을?”
“네!”
이런 것도 로벨을 쏙 빼닮아서 알았다.
……꽤 곤란한 부탁인 것 같았다.
저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웃는 걸 보면 말이다.
에드릭이 의심하자, 에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제 생일에 초대하고 싶은 분이 있어요! 들어주실 거죠?”
***
우리의 첫 단체 피크닉 장소는 영지의 어느 호숫가였다.
사실 우리 영지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찻길부터 난항이었다.
‘……가족 네 명이 마차에 탄 건 처음이네.’
내 품에서 잠든 에단 때문에 우린 아버님과 같은 마차에 탔다.
그런데 내내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응시하던 아버님이 불쑥 이상한 소릴 꺼냈다.
“조만간 에단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면 되겠군.”
“……예?”
“이름은 에단로, 정도로 하지.”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에단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든다는 건 둘째 치고.-이전부터 에단 이름의 성을 짓는 등 이것저것 챙겨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다른 것보다…… 아니, 우리 아버님이 작명 센스가 그렇게 촌스럽진 않은데?
귀족의 표본, 귀족 중의 귀족, 뭐 이런 세련된 명칭이 어울리는 분이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의 품격과 우아함을 넘는 귀족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했고…….
어쩌면 아버님이 에단에게 물들어 장난이라도 치시려나 싶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에드릭이 동조하듯 말했다.
“내가 신청하겠습니다.”
“……여보야. 장난이지?”
“난 좋아. 우리 이름도 한 글자씩 들어가잖아.”
……아무리 봐도 에드릭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하기야 그동안 에드릭은 항상 에단의 이름에 ‘에’만 들어가는 걸 싫어했다.
그러니 이번 일에 찬성하는 듯싶었다.
“바로 신청하도록.”
“예.”
……우리 집안이 이렇게 유치했었나.
한편 그 얘기를 들은 우리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플로르 집안 핏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긴다는 사실에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내심 말리길 바랐는데, 우리 부모님의 반응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긴 했다.
많진 않아도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니까.
현 황제는 과거에 북부 세 거점으로 가는 길에 에드릭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자고도 했었고.-에드릭이 야멸치게 거절했다고 들었다.-
우리 에단도 대단한 내 남편을 닮았다면, 충분히,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괜히 우쭐해져서 어깨를 들썩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만치에서 캔버스를 들고 있는 에드릭이 보였다.
“에드릭, 뭐 해. 또 그림 그려?”
“응.”
나는 그를 부르려다 말았다.
웬만해선 같이 있고 싶은데, 그 표정이 여느 때보다 진지했기 때문이다.
……하긴, 여기 호수 전경이 예쁘니까 그려두면 더 좋겠지.
요샌 유화의 활용도 웬만한 화가보다 빼어나서 보는 재미가 더 커졌다.
워낙 배우는 속도가 빠른 데다 열심히 하니까 더 그렇기도 하고…….
그런 생각으로 피크닉 가방을 손수 살피는데, 조부모들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던 에단이 쪼르르 다가왔다.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는 또 안 오시는 거예요?”
“응. 아버지께선 좀 떨어져서 노는 편이 좋으시대.”
“……?”
에단은 어머니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혼자 놀지?
함께 있어야 노는 게 아닐까??
자신은 그편이 훨씬 좋은데…….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에단은 이내 수긍했다.
존경하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니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에단은 꽤 요란했던 피크닉에서 돌아와 전시실을 구경했다.
그곳에 새로 완성된 그림이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도 다 못 볼 정도로 높고 큰 그림 속에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와아.”
아버지의 그림은 언제나 감탄이 나왔지만, 오늘은 더 그랬다.
동남부의 낙원이라 불리는 덴카르트의 호수는 겨울임에도 크게 춥지 않았다.
나무들이 앙상하고 호수는 얼어붙었지만, 포근하게 내려앉은 햇볕 때문인지 온화한 겨울의 느낌이 났다.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 놓으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에단은 완성된 그림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 속에서 자신과 어머니, 조부들이 생생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은 없지만, 그도 함께였다.
그 아래에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글씨체로 쓴, 작은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 속에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