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69
에필로그 (12)
여기까지 온 김에 각성센터와 마켓을 구경하기로 했다. 혹시나 아는 사람, 특히 송 실장님 안 계시나 싶어 협회 건물 쪽으로도 가봤지만 이제 막 헌터 등록한 F급은 입구에 발들일 수조차 없었다. 보안이 필요한 구역인 건 알지만 살짝 빈정 상했다.
헌터마켓 건물은 기존보다 훨씬 더 크게 들어섰다. 회귀 전과 달리 몬스터 용품 매장도 있었다. 매장의 입구에 세계 최초 몬스터 용품 전문 쇼핑몰, 도담 사육소 협력이라는 문구가 피스 사진과 함께 크게 붙여진 게 보였다. 그사이 이런 것도 했구나. 경훈이 형 일 열심히 하시네. 든든하다.
“새끼 몬스터용 장난감도 팔잖아?”
삐약이 하나 사다 줄까. 그리폰이나 유니콘 같은 성장 정보가 알려졌으면서 기승수로서도 유용한 몬스터 관련 용품이 가장 많이 보였다. 먹이용 몬스터 고기와 던전산 건초, 과일 등도 구입 가능했다. 강소영 헌터가 추천하는 드래곤 간식이라니, 믿음이 확 가는데. 한쪽에는 재배사육 허가가 난 던전산 식물과 물고기 코너도 자리 잡고 있었다.
‘진짜 제대로 안전검사 한 거 맞겠지.’
또 눈꽃나비 사태 일어날라. 마나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던전산 과일은 삐약이는 물론이고 빈이도 이유식으로 먹곤 했기에 몇 개 구매했다. …저렴한 걸로. 이 물결사과는 던전 내 강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개당 5만 원이라니. 운송비가 비쌀 만은 하지만 그래도. 던전 안에서는 회귀 전 평범한 F급인 나도 간식 삼아 주워 먹던 건데.
‘역시 던전에 들어가긴 들어가야 하나.’
하급 장비와 아이템을 파는 아래층에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나처럼 막 헌터 등록을 한 신입들도 여기저기 신기한 듯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박!”
누군가가 소리쳤다. 상품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2층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신입들도 얼결에 그 뒤를 따랐다. 나도 뭔가 싶어 쫓아갔다.
“무슨 일이에요?”
신입 중 하나가 2층에서 대기하는 헌터에게 물었다.
“황금 대장간 알지? 거기 대장장이들이 연습 삼아 만든 장비들이 가끔 마켓에 나오거든. 주로 하급이지만 등급 대비 능력치 좋고 무엇보다 저렴해.”
예고 없이 판매되기에 운이 좋아야 구매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며 들떠 말한다. 명우 제자들이 만든 장비를 파는 거구나. 하급 헌터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싶었다. 백화점 직원이 E급 이하 헌터들만 추첨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F급이긴 하지만 뒤로 빠졌다.
‘이젠 명우도 제자들에게 메시지 정도는 쉽게 전해 줄 수 있겠지.’
그전까진 시스템 연결이 제대로 되질 않아 현아 씨에게 무기를 보내 주는 것도 정말 간신히 성공했다고 하였다. 내 뒤처리 해주는 보답 겸 뇌물이라나. 만들어 주기로 약속도 했었댔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 쪽으로 향하였다.
‘각성 복지관?’
각성자 복지를 위한 곳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한산했다. 인기척이 없는 게 아직 정식으로 운영하진 않는 것일까. 아무튼 복지라니, 헌터 협회가 웬일로 이런 곳을 다 만들었대. 물갈이한 보람이 있구나.
여기 직원이라도 만나 볼까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얼마 걸어가지 않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민지수 씨?’
성현제를 통해 알게 되었던 헌터였다. 죽은 생물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시각 장애인이었지. 주위를 감지하는 검은색 지팡이를 여전히 들고 있었다. 민지수 씨가 나를 알아채곤 고개를 돌려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각성자 등록을 한 F급 헌터 한유진이라고 합니다.”
무해함을 어필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각성센터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혹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곧장 나갈 테니 한 번만 눈감…….”
아차. 말실수한 건가 멈칫하는데 민지수 씨가 작게 웃었다.
“아니에요. 누구든 방문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그렇군요! 괜찮으시면 여기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민지수 씨도 내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각성 관련 복지를 담당하고 있어요. 세성길드의 지원을 받아 세워졌지요.”
“세성길드요?”
“네. 실은 제가 주도하여 추진했거든요. 강소영 대리 길드장님께서 길드장님이라면 분명 수락하셨을 거라면서 적극 도움을 주셨지요.”
성현제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었다. 자기 사람이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성격이니까.
“앞으로 분야를 더 넓혀 갈 예정이지만 지금은 장애인 위주입니다.”
“아…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도움을 주는 건가요?”
민지수 씨가 그러하듯 다양한 보조를 받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한유진 씨는 이제 막 각성하셨으니 아직 잘 모르시겠지만, 헌터계는 등급의 차별이 존재하고 있지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5년간 지겹도록 겪었으니까요.
“각성자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계급이 생겨난 셈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각성자는 기존의 계급을 부수는 역할도 하였지요. 숫자나 알파벳으로 대놓고 매기진 않았어도 사회에서의 저는 F급이겠지요. 음, F급도 못 되는 등급 외일까요?”
“아니, 그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해도 솔직하게요, 현실은 다르잖아요. F급과 S급이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건.”
“저는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를 뿐이지만 주류는 아니니까요. 인간이 땅속에서 빛 없이 사는 생물이었으면 제가 주류였을 텐데 말이죠. 아쉬워라.”
민지수 씨가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각성은 기존의 모든 등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에요. 상급으로 각성하면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과거의 위치는 모조리 부서지죠. 인종이나 국적, 성별, 나이, 성적, 재력 등의 사람을 재단하는 대부분의 것들이요.”
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존의 등급은 점차 약해져 갈 거예요. 상급 헌터로 각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예요. 무시당하던 가난뱅이가 어느 날 돌연 S급이 될 수도 있겠죠. 이리저리 치이던 이민자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이도, 부패한 권력에 수탈당하던 서민도.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지인이 각성할 수도 있어요.”
“…그 혹시 모를 가능성이 브레이크가 되어 주겠지요.”
물론 드문 일이다. 하지만 사례가 생겨나고 늘어나면 조금쯤은 더 조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약자란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 이미 하급으로 각성한 사람이라 해도 그 가족이나 미래의 자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시스템 적용이 끝나면 F급도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 전에도 특수스킬은 언제든 얻을 수 있다.
누가 언제 갑자기 최상층으로 뛰어오를지 모를 세상이 되었다.
“대신 각성 등급이라는 새로운 등급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한유진 소장님이요.”
“…네?”
깜짝이야. 당연히 나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를.
“F급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좋은 케이스가 생겼으니 각성 등급 차별도 조금이나마 덜해지겠지요. 등급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건 모든 사람들이 해탈이라도 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건 그렇죠.”
모두가 욕심을 버리고 타인을 평가하지 않아야 가능할 테니. 민지수 씨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유진 소장님과 이름이 같아서일까요. 무심코 이런저런 소리를 해버렸네요.”
“아뇨, 아니에요.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이름이 같다는 것조차 자각 못 하는 건 아니구나. 그럼 나는 남들이 보기엔 한유진과 이름이 같으면서 옷차림도 비슷하게 하고 다니는… 음. 스타일 좀 바꿀까.
“아직 희망사항에 가까운 이야기이긴 해요. 브레이커 길드장님께서도 헛소리를 듣는 현실인걸요.”
“저도 점차 바뀌어 갈 거라고 생각해요. 던전과 각성자가 존재하는 한은 언젠가.”
나도 부모님 일찍 여의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형편 때문에 무시당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겨울 정도는 아니었다. 각성과 던전이 없었으면 더 잘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민지수 씨에게는 바뀐 세상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절벽과도 같은 선을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자 희망.
“아까 말씀하신 대로 맞춤식 각성과 아이템 제공을 하고 있어요. 특히 각성과 스킬 습득은 잘만 맞아떨어지면 생활하기 훨씬 편해지니까요. 하급 부유 스킬만 있어도 휠체어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거든요.”
완전한 비행이 아닌 몸만 살짝 띄워도 의족이나 지팡이만으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보호자의 각성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보호자요?”
“지적장애의 경우 당사자를 각성시킬 순 없으니까요. 오히려 각성하는 편이 위험하죠.”
민지수 씨가 안타까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동이 각성했을 때도 부모가 곤란을 겪곤 하잖아요. 비슷하답니다. 던전 브레이크로 피치 못하게 각성했을 경우 스탯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아이템이나 계약을 제공해 주고 있지요.”
아… 그런 경우도 있겠구나. 민지수 씨가 미성년자 각성자를 위한 교육시설이 생기게 되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각성 복지관 설립 허가를 받는 것도 훨씬 수월했다 하였다.
“각성을 하면 F급이라 해도 스탯이 조금은 오르잖아요. 그에 더해 10~20레벨까지 올릴 수 있도록 공략 보조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보호자들의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요.”
힘도 더 늘어나고 체력도 좋아질 테니까. 보충해질 스킬까지 얻는다면 더더욱 편해지고. 보호자들이 개인적으로 각성하고 레벨까지 올리기엔 힘든 경우가 많아 보조해 주고 있다고 하였다.
“관장님!”
그때 누군가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자가 뛰어오더니 내게 짧게 고개 숙이곤 민지수 씨를 노려보았다.
“혼자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잖습니까! 전화도 받지 않으시고!”
“아, 휴대폰을 놓고 왔어요. 잠깐 서류만 가지고 오려 했거든요.”
“불편하실 텐데 그런 건 제게-.”
탁, 하고 민지수 씨의 지팡이 끝이 남자의 발등을 찍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시운 씨.”
민지수 씨가 단호하게 말하고 하시운이 곧장 사과했다. 그러나 표정에는 불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 직원인가. 직급으로 부르지 않는 걸 보면 아닌 듯도 하고.
“한유진 씨, 각성 복지관을 자세히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옆에 서 계신 분이 경비견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걸요. 안내해 달라고 했다간 물기라도 할 기세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 인사하곤 발길을 돌렸다. 복지관 문을 나서 그 앞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많이 달라졌네.’
이것도 저것도 여러 가지가. 다행히 대부분은 좋은 쪽으로 바뀐 듯했다. 나쁜 쪽의 영향도 있긴 있겠지만 플러스에 마이너스를 해도 플러스가 아닐까. 그 정도면 된 거다.
‘슬슬 뭘 할지 정해야 하는데.’
개인방송을 진짜 해야 하나. 채터박스 파티 때의 경험은 있었지만 그땐 방송 준비는 알아서 다 해줬었지. 카메라부터 사야 하나? 폰으로 찍어도 되지 않을까. 촬영은 또 어떻게 해. 채터박스는 알아서 내 모습 잡아 줬는데… 카메라 들고 다닐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하나? 촬영한 동영상은… 어디로 어떻게 올리지.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어쩌지. 박하율의 도움을 받느냐 그냥 다른 일을 찾아보느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만. 차라리 내 동상 터뜨리고 뉴스에 나오는 게 빠를지도. 뭘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계단 아래 도로로 차 한 대가 스르륵 들어왔다. 검은색 승합차였다.
‘신입 헌터 모집하러 왔나.’
하급 길드들은 괜찮은 애들 없나 하고 주기적으로 각성센터를 방문하곤 하지. 차가 멈추더니 문이 열리며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내려섰다. 보자, E급 전투계. 주위를 살핀 남자가 나를 향해 내려오라며 손짓했다. 내가 일단은 신입이긴 한데.
‘어차피 던전 가긴 가야 하니까 말이나 들어 볼까.’
전처럼 던전 출입증 독점 입찰할 돈도 없고. 벤치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다가가자 남자가 웃었다.
“옳지, 착하네.”
응? 말하는 게 뭔가-.
“……?!”
순식간에 입이 틀어막히며 차 안쪽에서 손이 뻗어 나와 나를 끌어당겼다. 사람 여러 번 잡아 본 능숙한 솜씨로 내 몸을 억누르더니 이내 차 문이 닫히며 출발한다. 뭐야 이게. 대낮에 이게 무슨 일이냐.
‘설마 이놈들이 날 알아본 건가?’
지금은 납치당할 이유가 없는데? 평범한 F급인데? 초짜들 잡아다가 강제 계약하고 부려먹는 류인가? 그래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막 잡아가진 않을 텐데 뭐지. 힘도 딸리고 이해도 안 가서 굳어 있는데 한 놈이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소리 내면 아야 한다. 얌전히 있으면 아픈 일도 없어. 알겠지? 쉿.”
…아까부터 말을 왜 저렇게 하지. 다른 놈이 나를 보곤 중얼거렸다.
“이놈은 멀쩡하게 생겼네.”
멀쩡……. 설마. 내가 앉아 있던 곳은 각성 복지관이다. 지금은 장애인 관련 업무 위주였다.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겉보기에 별다른 장애가 없다면 지적장애 쪽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물론 직원이나 보호자도 있겠지만 직원으로 보기엔 옷차림이 아니었고 보호자로 보이는 행동도 아니었다. 손짓에 얌전히 내려오기도 했으니.
‘아니, 그래도. 이런 미친.’
멀쩡한 사람도 잡아다 부려먹기도 하니 장애인이면 더하겠지. 던전이 생기기 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고.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일단은 얌전히 있었다. 그렇잖아도 외곽 쪽인데 차는 더욱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큼직한 창고로 들어서더니 멈추어 선다.
“호구는 없었고 대신 다른 거 하나 주워 왔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서며 E급 헌터가 말했다. 신입 헌터 등쳐먹는 짓도 같이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일단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 창고 문이 닫혀 있어서인가 나를 묶거나 붙잡는 사람도 없었다.
“F급치고는 힘 좀 쓰던데 E급이라기엔 약간 모자라고.”
“잘됐네. 안 그래도 요즘 광부가 부족하던 참인데. 순진한 애들이 말도 잘 듣고 일도 열심이란 말이지.”
“밥만 챙겨 주면 그만이고.”
하시운 씨가 그렇게 경계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주 상습적인 놈들이구나, 이 새끼들.
“…대체 왜 그러고 사냐.”
“어?”
내 옆에 있던 헌터가 흠칫거렸다. 다른 놈들도 일제히 나를 돌아본다.
“뭐야, 저거 멀쩡한 놈 아니냐?”
“아니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순순히 잡혀 왔어?”
놈들이 어이없어했다. 그래도 크게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투였다.
“F급이지? 계약서 한 장 쓰면 얌전히 돌려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경찰서에 신고할 생각인데.”
내 말에 놈들이 웃었다.
“뭐라고 신고하게? 우린 그냥 착각해서 차에 태운 거야.”
“그래, 친구인 줄 알았지. 장난삼아 거칠게 납치하는 척해 본 거고 멀쩡히 보내 주는데.”
“어디 부러져도 포션 쓰면 그만이고.”
“포션 값 아까우니 좋게 좋게 가자, 응?”
그러게 지금 신고해 봤자 이놈들은 증거 싹 없애고 발뺌하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진짜 애가 있어서 얌전히 살 생각이었는데.”
텅, 내 손끝에 나타난 희고 검은 창이 시멘트 바닥에 내리꽂혔다. 갑자기 나타난 무기에 D급짜리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화르륵-!
검붉은 불꽃이 나를 보호하듯 휘몰아친다. 타인은 발들일 수 없는 불길 속에서 창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차르륵, 창의 형태가 연검과 같이 변화했다. 다만 칼날은 없이.
“우리 애들 살아갈 동네에 쓰레기가 나뒹구니 어쩌겠냐.”
봤으면 치워야지. 둔탁한 연검이 내 의지에 따라 크게 휘어진다. 놈들이 재빠르게 무기를 꺼내들었다. 팅! 화살이 날아들었다. 좋은 시도였지만.
치이익!
하급 화살은 불길을 뚫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 유현이의 것보다는 훨씬 약한 흑염이다. 그렇다 해도 고작 하급 무기쯤 삼키지 못할 리 없었다.
“분리수거도 못 할 타는 쓰레기다만.”
“컥!”
검을 타고 오른 불꽃이 가로로 들린 창을 단숨에 녹이고 날 없는 쇳덩이가 헌터의 가슴을 두들겼다. 우당탕탕, 바닥을 굴러 처박히더니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죽진 않았다.
“정말로 손 씻고 조용히 살기로 해서.”
휘익- 묵직한 연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 뒤쪽으로 달려드는 놈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빙그르 몸을 돌려 휘청거리는 놈을 강하게 걷어차 주었다. 다들 무사히 살아남으렴.
“으아악!”
“어딜 가냐.”
차르륵- 줄어들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창을 바닥에 강하게 찍었다. 그대로 휙, 지렛대처럼 창대를 기울이자 튕겨 오른 시멘트 덩어리가 도망치는 놈의 뒤통수를 정확히 두들겼다. 퍽,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다. 남은 두 명의 퇴로는 길게 뻗어나간 흑염이 가로막았다.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놈들이 비명을 지른다.
“시끄럽네. 잘 봐 봐, 예쁜 불이지 않냐. 착하고 잘생겼지.”
검은 불꽃이 내 손길 아래서 흔들렸다. 저 새끼들이 미친놈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다 사연이 있다고, 사연이. 하지만 설명해 줄 이유는 없기에 불길에 갇힌 놈들을 창대로 두들겨 기절시켰다. 내 의지에 따라 흑염이 얌전히 사그라져갔다.
기절한 놈들의 몸을 뒤져 휴대폰을 찾아냈다. 물론 그 전에 장갑을 끼는 것도 잊지 않고서.
“지문인식이 이럴 땐 참 좋단 말이야.”
비밀번호였으면 귀찮았겠지. 지문인식 잠금인 휴대폰 하나를 열어서 주인 놈의 손가락으로 전화를… 음.
‘일반 경찰서에선 제대로 처리 못 할 거 같고.’
작업장이 제법 큰 거 같은데 중급 이상 헌터도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내 폰을 꺼냈다. 차에서 내리면서 켜 놓은 녹음 파일을 확인했다. 포션 아깝다는 부분까지 희미하나마 확실히 녹음되어 있었다. 내용이 애매하지만 수사 들어갈 정도는 되겠지. 그 파일을 놈들 휴대폰으로 옮기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번호를 눌렀다. 파일을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온다. 반가운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송 실장님,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각성자 대상 납치범들입니다. 주로 장애인을 목표로 삼은 듯하고 뒷배가 더 있을 듯하니 가급적 조용히 와주십시오. 여기 주소는… 위치 추적 가능하시죠?”
“아, 죄송해요. 저는 먼저 가봐야만 합니다. 애기 이유식 줄 시간이거든요.”
정확히는 마석이지만. 저녁 되기 전에 집에 가야지.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좋네. 유현이한테도 전화해 볼까 했지만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을 테니. 예림이도 그렇고 연결된다 해도 비서실에서 막힐 것이다.
“뭐 챙겨 갈 것도 없고.”
그래도 차비는 받아 가야지 싶어 지갑들을 털었다. 다들 카드를 쓰다 보니 현금은 얼마 없구만. 송 실장님과 마주칠세라 얼른 공장을 빠져나갔다.
“지하철역이…….”
걸어서 30분 넘게 걸리네. 얼른 면허 따고 차… 살 돈 없지. 집에서도 언제 들켜서 쫓겨날지 알 수 없는데. 가지고 있는 마석도 빈이랑 삐약이 밥이기도 하다 보니 무작정 팔지는 못하고.
‘그래도 얘들아, 아빠가 어떻게든 돈 많이 벌 테니까.’
비싼 과일도 팍팍 사줄게. 박하율과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고 보니 하율이 녀석 어디 숨겨 둔 비상금 같은 건 없나. 폰으로 던전 정보 사이트를 검색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우리 애들도 그립고 내 재산도 그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