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 달콤한 디저트
이유선은 대흥재단 이사장실을 나와 대흥중공업 서울사무소로 발길을 돌렸다.
오너의 의사를 확인했으니, 이제 승계작업 실무를 맡는 이의 의사를 확인할 셈이었다.
“어, 그래, 유선아. 어서 와라. 언론의 조명을 받는 스타가 된 기분이 어때? 허허.”
대흥중공업 최진석 사장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가 고안하고 시행에 옮긴 승계작업이 첫걸음부터 암초를 만났고, 그 암초가 눈앞에 있음에도 말이다.
이유선은 최 사장이 저리 여유로운 이유를 확인해야 했다. 인사를 빙자한 시답잖은 소리들을 적당히 나누고 나서 바로 확인절차에 들어갔다.
“사장님.”
“눈빛 달라지는 게 무서운데? 허허. 하고 싶은 얘기 편하게 해.”
“주주로서 요구하는데, 지금이라도 지주회사 전환 백지화할 수 있어요?”
“허허.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다? 변화구 따위를 취급하지 않는 건 여전하구나.”
“대답해 주세요.”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겠지만, 그건 어려워. 버스 출발한다고 동네방네 다 소문냈는데, 이제 와서 기름 떨어져서 운행 못 한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허허.”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모습. 이유선은 보다 공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저는 여러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제가 반발할 걸 알면서도 강행한 건 사장으로서 정무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은데요.”
“허허. 나한테 그러지 마.”
“회사 대표인 사장님한테 그러지 않으면 누구한테 얘기해야 하나요?”
“나 같은 월급쟁이한테 백날 얘기해봐야 달라질 게 없잖아.”
“월급쟁이 논리로 빠져나가시겠다? 그럼 해양플랜트로 회사가 휘청거리는 것도 책임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에이, 그건 아니지. 해양플랜트는 백프로 내 잘못이 맞아. 내가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것과 경영권 세습 문제는 다른 차원이 아닌가? 월급쟁이가 세습 문제까지 이러쿵저러쿵하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실무만 맡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허허.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건, 편 들어달라고 찾아온 건가?”
“편 들어주시면 좋죠.”
“허허. 유선이 너도 알겠지만, 너나 형선이나 내 조카나 마찬가지 아니야? 내가 여기서 누구 편을 들겠다고 하기가 좀 그래.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나 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러니 곤란하게 하지 않았으면 싶구만.”
중립을 서겠다는 의사를 확인했다. 이유선은 그걸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최 사장은 이형선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여유로운 태도의 이유를 깨달았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이편저편도 아닌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허세였다. 섬기는 주인이 없으니 누구든 와서 데려가라는 유혹의 신호인 것이다.
이유선은 질문의 의도를 바꿔야 했다. 저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대흥중공업에 필요한 인재인지 확인하겠다는 의도로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적자 난 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저도 대흥중공업 주주니까 경영 방침에 대해 물어보는 건 월권이 아니죠?”
“월권이래도 대답해야지. 나도 명예회복이 필요하거든. 허허.”
“명예회복이요?”
“해양플랜트야 뭐,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다고 생각해야지. 확실한 건 난 그 수업료를 다시 받아낼 생각이야. 그 많은 돈을 털리고도 가만 있는다면 사장의 자격이 없는 거지.”
“어떻게요?”
“유일조선한테 1위 자리 빼앗긴 지가 반년이 넘었는데, 다시 달려야지. 이번에 지주회사 전환 끝나면 정신 바짝 차리고 고삐를 조일 생각이야.”
“너무 두루뭉술한 말씀 아닌가요?”
“허허. 뭐, 면접이라도 보는 것 같구만.”
“면접이라고 생각하고 말씀해 주세요. 해양플랜트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상선시장에서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
면접이 맞았다.
이유선은 대흥중공업을 차지하더라도 경영진을 유임할 생각이었다. 급격한 변동은 조직 안정화에 해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적자를 야기한 최 사장까지 살려줘야 할지는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는 면접자리였다.
질의응답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최 사장은 면접관 이유선이 흡족해할 만한 대답만 읊조렸다.
유일조선과 협력을 강화해 상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 해양플랜트 부서를 축소하고 계약부서를 강화해 눈 뜨고 코 베일 일이 없도록 하겠다 등등.
대흥중공업을 부흥시키겠다는 최 사장의 향후 계획은 이유선을 미소 짓게 했다. 비싼 수업료를 낸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만하면 합격 판정을 내려도 되겠다고 생각이 들 찰나에, 최 사장이 달콤한 디저트를 내놓았다. 이유선은 미소를 넘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내가 봤을 땐 이 승계작업의 키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고 봐. 지지해주면 수월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골치가 아프겠지. 그렇다고 해서 회사 차원에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떤 결론을 내릴지 기다려봐야지. 허허.”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유선은 결론을 내렸다. 최 사장이 자기편으로 오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걸 위해 그간의 실책을 만회할 많은 준비를 한 것도 충분히 느꼈다.
이제 남은 건 주주총회에서 회사 분할 안건을 저지하고, 바로 주주총회 소집해서 이사회를 장악하는 일뿐이다. 이유선은 홀가분하면서도 묵직한 마음으로 통영으로 발길을 돌렸다.
***
서울 출장을 마친 우리 마나님께서 돌아오셨다.
이유선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이 아주 한 가득이야. 서울 순회공연의 성과가 좋았던 모양이지?
“어, 내 의도대로 잘 풀린 것 같아. 아빠도 그렇고, 최 사장님도 그렇고.”
“얘기 잘하고 왔다는 소리구만. 그럴 땐 내 티칭이 큰 도움이 됐다, 혹은 우리 의도대로 됐다고 얘기하는 거야.”
습관적으로 반박하려던 이유선이 입을 쭈뼛 내밀었다.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못해서 분하다는 의사, 잘 확인했습니다.
“아니, 난 그래도 아빠가 막 혼내고 그럴 줄 알았거든? 근데 되게 덤덤하게 반응하셔서 완전 놀랐잖아. 오빠는 아빠가 그렇게 나올지 예상했어?”
“그럼. 궁예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다 보이는 법이야.”
“또 시작이네.”
“어려운 것도 아니야. 그냥 상식이지. 장인어른께서 이제 정치 그만두겠다고 은퇴 선언하셨잖아? 은퇴하셨다고 해서 욕망까지 내려놓으신 건 아니거든. 그럼 남은 욕망이 뭐겠어?”
“욕망이라고 하니까 좀 그렇긴 한데, 뭐 대흥중공업을 잘 물려주는 거겠지.”
“그렇지. 그런데 딸내미가 반발하면서 분쟁을 일으킨다? 그것도 경쟁사의 지원을 받아서? 그걸 좋게 받아들일 리가 절대 없지.”
그래서 난 이유선에게 대흥중공업은 이씨 가문의 재산임을 강조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조력자로 나선다고 한들 그 재산이 유씨 가문으로 넘어갈 일은 절대 없다고 말이다.
딸바보로 명성이 자자한 이병진 이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빤하디빤한 것이다. 거기다 이기더라도 절반을 내놓겠다는 통 큰 제안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다.
“이럴 때 보면 세상사에 달관한 노인네 같다니까. 뭐, 이번 생이 인생 2회차라도 되는 거야? 하하.”
예리한 녀석 같으니. 맞는 말을 했지만, 아무 대꾸도 안 하련다.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진 이유선은 말문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인생의 큰 업적 달성을 앞두고 잔뜩 흥분한 모습이랄까.
“근데 진짜 놀란 게 뭔지 알아?”
“그렇게 물어보면 인생 2회차라도 못 맞춰.”
“하여간 자연스럽게 받아넘긴 적이 없어, 아주. 암튼 내가 대흥중공업 잘 키워서 유일조선까지 먹겠다고 했거든? 아빠가 어떤 반응이셨을 것 같아?”
“어떤 반응이셨는데? 너무 궁금해!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적당히 해라, 진짜.”
이성 간의 대화가 이리 어려운 법이다. 제발! 그냥 쭈우욱 얘기해 주면 안 되는 건가…….
“그래서 장인어른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어, 아빠가 아주 흡족해하시더라고. 내 딴엔 터무니없는 얘기 했다고 한 소리 얻어먹을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반독점규제 때문에 안 될 거란 얘기는 안 하시고?”
“어, 맞아, 맞아. 그 얘기도 하셨지. 그래도 뭐, 목표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오빠가 유일조선으로 세계 1위 하겠다고 한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였잖아. 근데 결국 해낸 거고.”
“그래서 우리 회사를 잡수시겠다? 이젠 나랑도 싸워야겠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두 회사가 하나가 되면 우리 회사가 되는 거고. 우리 애 태어나면 우리 애 회사가 되는 거겠지?”
‘우리’란 말이 주는 어감은 참 따뜻하다. 이미 세계 1위를 달성한 지금, 삶에 대한 맹렬한 의지가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우리’가 세울 왕국의 모습을 생각하니 십이지장충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유일조선과 순양중공업이 결합한 막강한 선박왕국이 대흥중공업과도 하나가 되면? 조선업계 절대 강자가 되겠지. 자손 대대로 왕좌를 이어받을 것이며, 나는 선박왕국을 세운 선박왕으로 길이길이 칭송받을 것이다.
이번 생은 참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다는 회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자니, 이유선이 바로 끄집어낸다.
“오빠, 혼자 또 김칫국물 마시고 있지 말자고. 우리가 이기고 나서 마셔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이기는 게 우선이지. 자, 광고도 엄청 때렸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알바생들이 전국을 돌면서 위임장 받고 있을 거야.”
“그래서 지분 얼마나 확보한 건대?”
“32%. 어차피 주총 참여율이 90% 넘기기는 힘들고, 자사주는 의결권 없으니까 그걸 제외하면 얼추 40% 정도이지 않을까 싶어.”
“그럼 국민연금만 우리 손 들어주면 과반 확보할 수 있겠네?”
“다음 주에 결론 낸다고 했으니까 기다려야지. 국민연금이 우리 손 들어준다고 하면 주총이 의미도 없지. 그냥 우리가 이기는 거니까.”
“운명의 한 주가 되겠네.”
“그래서 최 사장의 역할이 중요한 거야. 확실히 우리 쪽에 붙는 거지?”
“그럼! 대놓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건 확실해.”
주주총회. 어지간해서는 안건이 부결되는 경우가 없다. 대주주가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회사가 부리는 기술 앞에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주총을 여는 회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건을 통과시킨다. 돈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힘으로 제압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주총 장소를 급하게 변경시키기도 한다. 어떻게든 통과시키려는 회사의 의지에 반대세력이 힘쓰기란 쉽지 않다.
기술사용 승인권을 가진 대흥중공업 최 사장이 이유선 편에 붙겠다고 한다. 이형선으로서는 홈그라운드 이점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거 해볼 만하겠어. 아니, 확실히 이길 것 같아.
“참, 이 여사님?”
“응?”
“노조가 가진 우리사주도 절대적으로 필요해. 지금이야 우리 편 들겠다고 했지만, 언제 또 마음 바뀔지 모르니까 수시로 찾아가서 대화해야 해.”
“오케이, 오케이.”
“어차피 회사분할해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건 필수코스잖아. 우리가 정권 잡고 나서도 노조가 반발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충분히 잘 설득해야 해. 이 바닥은 노조 제대로 관리 못 하면 나락으로 간다고.”
“오케이요!”
“대답이 너무 건성건성인데?”
“잘 새겨듣고 있어. 그리고 또 체크할 게 있어? 이 정도면 할 거 다 한 거 같은데?”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기다리면 되겠지.”
나도 이유선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국민연금이 우리 편에 서겠다고 하면 축포를 터트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주주총회 끝날 때까지 마음 졸이면 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기면 좋고, 져도 뭐…….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런 게 세계 1위 조선사를 이끄는 사람의 여유로움이랄까? 후후.
대흥중공업을 차지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나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자기야.”
“응?”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기다리면 될 일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고.”
“더 중요한 일?”
“어린이 만들어야지!”
결혼했고 혼인신고도 했으니, 출생신고도 서둘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