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전범재판 (1)
1944년 7월 2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나치당 창립자이자 초대 당수, 폴란드 보호령 제1대 총독 안톤 드렉슬러의 장례식은 그의 고향인 뮌헨에서 국장으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국민들 사이에서 드렉슬러는 이름만 겨우 알려졌을 뿐이었지만 나를 비롯한 나치당 고위 관료, 장군들이 대거 참석했기에 자연스레 사람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프리드리히 실러의 가 연주되었다. 이윽고 포차에 실려 운구되는 드렉슬러의 관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려 고인의 마지막 길에 예를 표했다.
“친애하는 독일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한 명의 전우를 떠나보내게 됐습니다.”
나는 직접 추도사를 읊었다. 하켄크로이츠로 뒤덮인 관에는 드렉슬러의 유해가 들어있었다.
“나는 이 죽은 이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창시자로서 가장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 중 한 명이었고, 제3제국 탄생의 기틀을 닦았으며 제국의 모든 일꾼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신의 부름을 받은 그는 이제 편안히 쉴 자격이 있습니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제3제국의 총통으로서 나는 친애하는 동지 드렉슬러, 당신에게 독일 다이아몬드 십자장을 수여합니다. 당신은 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드렉슬러는 뮌헨의 군인묘지에 묻혔다. 그를 위해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가 디자인한 그의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귀환한 나는 종전을 기념하며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전쟁 내내 가장 큰 공훈을 세운 괴링, 카이텔, 브라우히치, 룬트슈테트, 만슈타인, 구데리안, 레더, 라이헤나우, 베버, 되니츠, 리히트호펜는 2차대전 종전 기념으로 제정한 자주포 다이아몬드 매머드 대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묄더스, 갈란트, 뷔크, 모델, 클라이스트, 하우서, 디트리히, 호트 등등에겐 황금다이아몬드백엽검기사십자장이 수여되었다.
아직 중국에 있는 롬멜과 앞서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을 지휘한 팔켄하우젠도 독일로 귀환하는 즉시 해당 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군인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지대한 공훈을 세웠던 토트, 슈페어,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던 리벤트로프, 선전은 기가 막히게 잘 해낸 괴벨스도 독일 다이아몬드 십자장을 수여했다.
힘러는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본인도 내심 받고 싶은 눈치여서 선심 쓴다는 생각으로 챙겨줬다.
그래도 명색이 SS 제국지도자인데 안 주는 것도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전보다 더 사람이 됐기도 하고. 내친김에 헤스에게도 수여했다.
“포상은 이 정도면 얼추 정리된 거 같고…….”
이제 남은 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작업이렷다.
단순한 복수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 전쟁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하게 하기 위해선 반드시 재판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전범들을 재판장에 세워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낱낱이 까발리고 그에 걸맞은 처벌을 내려야 사람들은 전쟁이 누구의 잘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전쟁을 시작한 입장으로써 선과 악, 질서와 정의 운운하는 게 조금 민망하긴 하다.
조작되었다곤 하나 엄밀히 말해서 침략받은 입장인 폴란드인들과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라가 통째로 독일에 넘어간 체코인들이 보기엔 대단히 같잖게 보일 터.
하지만 어쩌겠나. 역사를 쓰는 것은 승자인데.
이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깨지지 않은 불변의 법칙이다.
재판을 통해 독일은 여러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그중 최고가 바로 독일이 선이자 정의이며, 독일에 대항했던 국가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마구 매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독일이 정의를 집행한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 재판에는 어느 때보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재판 장소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으음, 고민되는군.”
인류 역사상 희대의 재판이 열릴 장소로 어디를 선택하면 좋을까? 이게 보통 고민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폴란드에서 시작되었으니, 바르샤바나 크라카우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괴벨스의 말에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곧 현실적인 문제로 고개를 저었다.
“폴란드는 기각일세. 재판에 회부할 범죄자 중에서 폴란드인들의 비중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인 데다 재판 중에 폴란드인들이 난동을 일으켜 전범들이 탈출하기라도 하면 대단히 곤란해지네.”
폴란드 파르티잔들은 사실상 토벌이 완료되었으며 폴란드인들의 민심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폴란드에서 재판을 열기에는 안전상 여러 문제가 우려되었다.
폴란드인들 입장에선 자기네 조국을 침략한 독일인들이 정의 운운하며 재판을 여는 것도 같잖게 보일 텐데 그것도 재판을 자기들이 사는 도시에서 한다? 상징성 자체는 있을지 몰라도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프랑스는 한때 적국이지만 지금은 엄연한 동맹이라 파리에서 여는 것도 안 된다.
지금도 프랑스는 자신들이 4주 만에 항복한 것은 치욕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젠 독일과 동맹이라 대놓고 티만 안 낼 뿐.
그런데 재판을 파리에서 연다? 그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것 같나?
“그렇다면 독일에서 여는 게 어떠신지요?”
“독일에서 열자고?”
“예. 독일의 도시에서 재판을 열어 세계인들에게 독일만이 유일한 법이자 질서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는 겁니다. 승자인 독일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재판을 열어 피고들을 단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거야말로 매우 괜찮은 그림이 되지 않겠습니까?”
괴벨스의 말도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나는 괴벨스의 제안을 기각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물론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생각해보게. 우리가 베를린이나 뮌헨에서 전범들을 재판하면 전범재판의 의의가 퇴색될 우려가 있네. 승자인 독일이 멋대로 힘을 휘두르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단 말이네. 고로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의 도시에서 재판을 열어야 전쟁이 누구의 잘못인지 확실하게 인식시킬 수 있네.”
미국과 소련, 영국도 자기네 도시에서 재판을 열 수 있었지만,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재판을 열었다.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독일의 도시에서 재판을 여는 건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지만 결국 기각했다.
“런던은 어떠신지?”
“런던이라…… 나쁘지 않군.”
영프의 대독 선전포고로 실질적인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으니, 재판을 열기에 런던만큼 상징적인 도시도 드물었다.
비록 전쟁 중에 루프트바페의 혹독한 폭격으로 런던의 랜드마크들이 대부분 파괴되긴 했지만, 재판을 열 만한 장소 정도는 충분히 남아있다.
이 같은 문제로 런던을 재판 장소로 삼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별안간 자유 러시아 쪽에서 연락을 취해왔다.
모스크바에서 군사재판을 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치적 상징성으로만 따지면 모스크바도 런던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영국보다 나중에 항복한 국가가 소련이고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였으니 모스크바에서 재판을 여는 것은 아주 타당했다.
심지어 블라소프는 크렘린 궁전을 재판 기간 동안 재판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세계가 스탈린과 공산당이 저지른 죄를 알고 러시아인들 사이에 남아있는 공산주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면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의 재판은 아직 겉으로나마 남아있는 소련에 상당한 치욕을 안겨줄 수 있다.
“모스크바로 하지. 괴벨스, 자네 생각은?”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그럼 정해졌군.”
세기의 재판 장소는 모스크바로 낙찰되었다.
***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아서 해리스.
이 둘이 독일군의 포로가 된 영국 인사들 가운데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지고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애틀리, 이든, 브룩처럼 처칠과 함께 영국을 지휘했던 상층부 인사들은 전부 캐나다에 있었다.
이들 외에도 전범 혐의로 재판이 예고된 군인들은 여럿 있지만, 모두 계급도 낮고 이름은커녕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전부.
소련 전범들의 상황도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육군 중장 안드레이 예료멘코.
소련 검찰총장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전쟁 말기 비행기를 타고 시베리아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호위를 맡은 부대의 부대장이 생각을 바꿔 그를 배신하고 독일군에게 투항하면서 비신스키를 넘겨주었다.
네임드라고 부를 수 있는 급은 이 셋이 전부였고 그 외 나머지는 대부분 고만고만한 직급을 가졌지만, 숫자는 소련이 영국보다 훨씬 많았다.
국적이 아닌 공산당 전체로 확대하면 일찍이 독일군의 포로가 된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그의 참모 밀로반 질라스도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장군으로 소련으로 도망쳐 붉은 군대에서 복무한 엔리케 리스테르도 2차 독소전쟁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리스테르가 독일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코는 리스테르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독일은 재판이 우선이라며 거절했다.
재판에 필요한 증거들을 모으고 크렘린의 상원궁전 내부를 재판장으로 개조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재판준비가 진행되어 가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열릴 전범들의 재판에 대한 소식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캐나다에 터를 잡은 영국 망명정부는 후안무치의 극치이자 폭거라며 핏대를 세웠지만, 미국의 반응은 조용했다.
소련도 자신들의 서기장이 재판에 회부된다는 소식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에서 독일처럼 재판을 준비 중이었고 소련은 독일에 바쳐야 할 배상금과 공납 문제로 괜히 독일에 트집잡히고 싶지 않았다.
캐나다의 망명정부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발광하건 말건 재판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어 갔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계절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었을 무렵인 11월.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
1944년 11월 20일
자유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크렘린 상원궁전은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러시아 최고 입법기관인 원로원의 건물로 사용되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건국된 후에는 레닌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레닌이 죽은 뒤 권좌를 차지한 스탈린은 상원궁전에 개인 서재를 두었다.
하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모스크바 전투가 벌어지면서 상원궁전도 전투의 참화에 휩쓸렸다.
그로 인해 궁전 외부와 내부에는 전투 당시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재판장으로 변모한 상원궁전 내부에는 재판을 위해 끌려온 전범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전범들의 국적은 대부분 소련과 영국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생기가 없었고 며칠은 굶은 듯 수척했으며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눈알을 굴려댔다.
전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단연 처칠과 스탈린이었다.
세계 초강대국 영국과 소련의 향방을 결정하던 이들이 이제는 피고인 신세가 되어 승자인 독일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처칠과 스탈린 둘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두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어쩌다가…….”
“아, 신이시여.”
“레닌 동지께서 일으켜 세우신 나라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는 투덜거리며 불만과 한탄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재판장의 경비를 맡은 독일군 헌병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고, 헌병들의 날 선 눈총을 받은 전범들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판장의 경비를 맡은 헌병 중에는 영국과 소련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무장친위대의 군복을 입은 그들은 국적이 같은 전범들의 감시 및 경비를 담당했고 독일어가 능숙했기 때문에 독일군 장교와 전범들의 소통창구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범들에게 동정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그 반대로 영국인 SS 헌병들은 영국 자유군단의 일원이었고, 우크라이나인 SS 헌병들은 공산당의 잔혹한 통치로 굴라그에서 수감생활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전범들이 허튼짓이라도 할라치면 지급받은 검은 몽둥이를 휘두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재판을 맡을 판사들이 들어서고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전범재판을 맡을 독일인 판사들은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었다.
제3제국 전 법무장관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민족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 민족재판소 판사 에른스트 라우츠.
이들 외에도 영국과 소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본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온 판사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전범들에 대한 증오심이 독일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고 기소를 맡은 검사들은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의 죄목에 대해 읽어 내려갔다.
“나는 무죄요.”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자, 처칠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무죄.
그 말에 독일의 검사와 판사들은 비웃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판사는 처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무죄라니. 피고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프라이슬러가 처칠에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쟁에서 진 패배자 주제에 아직도 당당한 척 허세를 부리느냐고 시원하게 욕설을 갈기고 싶었지만,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으니 자중하지 않으면 아-주 실망할 것이라는 히틀러의 충고를 가장한 경고에 그는 퍽 정상적인 판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 행동은 내 조국을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오. 애국심에서 한 행동이 어찌 유죄가 될 수 있겠소?”
수감생활 동안 살이 빠져 본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척해진 상태였지만 특유의 배짱은 재판장에서도 그대로 작용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소. 나는 무죄요, 무죄! 이 재판장에 있을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