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202)
080. 최종결전(3)
5.
조선 제24대 국왕 이환.
추후 헌종이라 불리게 될 그의 존재는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그렇기에 부관은 긴급한 상황임에도 한 번 더 짚고 넘어갔다.
“장군. 폐하의 명을 완수하려면 조선왕의 신변을 온전히 확보해야 합니다. 만약 여기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일이 제대로 꼬일 겁니다.”
조선왕은 영국의 여왕에 버금갈 정도로 상징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방인인 러시아군이 대신할 자를 고른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울뿐더러 논란의 여지가 컸다.
하지만 막심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왕의 목숨은 마르크스가 우리와 교섭할 수 있는 마지막 패다. 최후의 최후까지 붙들어야 할 목숨줄이라는 거지. 그걸 홧김에 내팽개칠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음. 확실히 쉽게 죽이진 않겠군요.”
“더구나 공산당 놈들은 언변 하나는 기가 막혀서 괜히 협상 같은 걸 했다간 말리기 쉽다.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면 대가리를 꼬드겨 밖으로 끄집어내야지.”
“아! 장군께서는 마르크스를 유인하겠다는 거로군요. 대단하십니다.”
“무얼. 마르크스의 성격을 하나하나 일러주신 폐하와 정보국 요원들 덕분이지.”
아직 기계장치를 이용한 확성기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
다 무너져 가는 성벽 위에서 소리를 질러봤자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물론 전령을 보내온 것은 물론이요,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피다 보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으나……
“보이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포격하라. 다만 조선왕과 마르크스 쪽은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장군. 제국의 기술력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막심의 명이 떨어진 뒤.
러시아군은 무작정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거셌는지 영국군 정예병은 당연하고 악에 받친 조선인들마저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이런 병신들. 눈깔이 삐었나! 제대로 전달한 게 맞아?”
“예, 그렇습니다. 다섯 번씩이나 보냈는데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으니 억류당한 게 틀림없습니다.”
“빌어먹을! 지랄도 가지가지 하는구나!”
상스러운 욕을 내뱉은 마르크스는 하는 수 없이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러시아군은 모른 척 밀어버린 뒤 꼭두각시를 세울 모양이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법! 우리는 러시아군과 함께 몰려든 군중을 공략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공세를 막고 자연스레 협상장으로 유도하는 게지.”
“어떻게 말입니까? 뭔가 방도라도 있습니까?”
“어쩌긴 뭘 어째! 조선왕을 겁박해서 마음을 흔들어놔야지. 조선인들의 발을 묶어놓으면 러시아군도 더는 진격하기 힘들 테니까.”
극동까지 건너온 그들의 수는 많아봤자 수천가량.
당장 이곳에 모인 병력만 하더라도 겨우 3천이 될까 말까였다.
그 정도면 제아무리 뛰어난 무기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내가 고작 이런 곳에서 무너질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이 땅에서 기필코 공산당만의 터전을 만들고 말 것이야!’
호위대, 특수부대원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 마르크스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환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댄 모습은 모두의 이목을 끌 정도로 강렬했다.
“다들 주목!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조선왕의 머리는 날아간다. 알아듣겠나?”
감히 임금의 머리에 총을 들이밀다니!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앉은 조선에서는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러시아군 측에 붙은 조선인들은 휘황찬란한 곤룡포를 보고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저 가녀린 몸이 정말 임금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군.’
‘어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그들이 주저할 때.
후방에서 말을 타고 달려온 막심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공격 중지! 이대로 조선왕을 죽이면 그 자는 영원토록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설마 그걸 원하는 자는 없겠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죄인이 될 거라니.
공동체 사회와 성리학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에서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막심의 의도를 지레짐작한 마르크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푸하하!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그래, 너도 한번 지껄여보거라!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마르크스는 조선왕의 입을 묶은 천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아직 스물도 채 넘지 않았다고 했지? 게다가 다른 사람이 대신 통치해온 탓에 성격도 강하지 못하다고 들었다. 지금껏 별말도 없이 꾹 참아온 것만 봐도 애송이는 애송이야,’
마르크스는 조선왕이 울고불고 빌며 추태를 보이길 원했다.
나중에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려면 기존 권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으므로.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이환은 포박당한 몸으로도 자세를 바로잡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어다.
“나의 백성들이여. 나라에 힘이 없고 과인이 죄를 많이 지어 온 국토가 전란에 휩싸였구나.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만약 내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 그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군주가 되겠다!”
어찌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목소리는 잔뜩 갈라지고 쉬어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아아. 주상전하께서 이런 뜻을 품고 계셨구나.’
‘수렴청정으로 인해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도 못했을 텐데. 역시 잘못된 건 전하의 주변을 둘러싼 세도가들이었어. 그놈들을 쳐 죽여야 해!’
어설픈 조선어 실력으로 인해 뒤늦게 뜻을 헤아린 마르크스는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감히 이놈이 다 된 밥에 초를 치려 들어? 죽어라!”
마르크스는 개머리판으로 이환의 목을 쳐 기절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날아든 총탄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는 것이 먼저였다.
타앙!
“으아아악!”
저격소총에 어깨를 맞은 마르크스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막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마르크스와 조선왕 주변으로 다가서는 자가 있다면 전부 쏴버려라. 저 두 사람의 신변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탕! 타앙!
비록 숫자는 적었으나 이곳에 모인 러시아군은 막심이 고르고 고른 정예병들이었다.
그리고 남부 시베리아, 제국 군사 아카데미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저격수들의 실력은 단언컨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바람의 방향을 읽고 표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 그게 진정한 저격수의 자질이지.’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 그 하나하나가 대업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니!’
저격수들의 엄호 속에서 두툼한 장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방탄복을 입었다고는 하나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나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그리고 그들의 충성과 헌신은 빛을 발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아악!”
총구를 겨누며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마르크스는 병사들의 군홧발에 차여 손이 피로 물들었다.
황급히 이환을 들쳐 멘 병사는 어설픈 조선어로 말했다.
“무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잠시만 참아주십이오.”
“괘, 괜찮네.”
“평소 지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의원들에게 바로 인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 그래주면 고맙겠네.”
이환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의미가 컸다.
‘폐하께서는 조선왕이 제대로 된 인물이라는 게 검증되면 어떻게든 살려내라고 하셨지.’
원 역사에서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해야 했던 헌종.
그 역사가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병사들이 두 사람을 데려오자마자 막심은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조선왕의 상태는 어떠한가?”
“맥박이 안정적인 걸 보니 정상입니다. 다만 피로 때문에 잠이 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이제 이쪽을 요리할 차롄가.”
막심은 고통 속에 신음하는 마르크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그러곤 공산당원들이 몰려있는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마르크스가 헌종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새여싿.
“이 녀석을 살리고 싶다면 항복해라!”
처음에는 지도자를 잃어 당황했다.
그러다 러시아군의 수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엄한 생각이 솟구쳤다.
‘나라고 해서 위원장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
‘이대로 도망쳐서 공산주의란 걸 설파하면 나도 권력을 쥘 수 있잖아.’
살살 눈치를 보던 영국군은 죄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의 최후를 직감한 막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놈들과 동조하는 세력을 싹 다 죽여버려라!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6.
1845년 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싹을 틔울 무렵.
나는 방 안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후우. 슬슬 연락이 올 때도 됐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샤를로테가 곁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와 향긋한 살결이 느껴지자 날카로웠던 기분이 한층 누그러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력해왔잖아요. 신께서도 분명 굽어살피실 거예요.”
결혼 이후 샤를로테는 곁에 자주 붙어 다니며 착실하게 보좌해왔다.
그렇기에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잘 알았다.
‘가보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지도 못한 인물들을 이용해 계획을 짜 맞춰 간다라. 이게 말이 쉽지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나로 인해 바뀐 역사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툭하면 정보국에 들러 자료를 수집하고 쿠즈민, 세르게이, 막심, 나폴레옹 등으로부터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아! 힘들고 고됐던 지난 세월이여!’
아련한 기억이 스쳐 지나갈 무렵.
샤를로테를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그 녀석이 있어서 살았어. 나 혼자 모든 걸 다 해야 했다면 진즉에 도망쳤을걸?”
괜히 엄살을 피우자 샤를로테가 손등을 툭 하고 쳤다.
“에이, 농담도 참. 계획을 짜고 인력을 배치한 건 전부 당신이 했잖아요, 그 애도 이제 막 일에 익숙해졌는데 무슨 소리예요.”
“흐흐. 나도 조금만 있으면 오십이야. 당신이랑 오붓하게 말년을 보내려면 미리미리 준비해둬야지. 안 그래?”
“어머. 기특하기도 해라. 그런 건 진즉에 말을 하라고요.”
번듯한 어른으로 자라난 장남 알렉산드르는 어머니, 샤를로테와 할머니, 마리야의 피를 이어서 그런지 훤칠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나를 닮아 영민하고 똑똑하기까지 했으니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갔다.
‘그렇다고 해도 절대 쉽게 물려줄 수는 없지. 전생까지 합치면 7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얻어낸 자리니까.’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온전히 물려받기 위해선 엄격한 검증 절차를 통과해야만 했다.
내가 샤를로테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게오르기가 들어왔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머리가 산발인 채였다.
“폐하. 성공했습니다. 모든 게 폐하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헉헉거리는 숨결이 섞여 제대로 들리진 않았으나 게오르기의 표정만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준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남은 일은 내게 맡겨라.”
1807년 시작된 위대한 러시아의 서막.
이제 내 러시아에 세계를 바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