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333
#333화
박건은 내 장황한 설명을 듣고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나는 잔에 담긴 차를 홀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음.’
확실히 여기는 차가 기가 막힌단 말이지.
박건이 뭐라 입을 열려는 것 같아 잔을 내려놨다.
“……제 아버지는 경찰이셨습니다. 정의롭고, 또한 존경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살해당하셨습니다.”
“유감입니다.”
“그래서 군인이었던 저는 전역 후에 경찰이 됐습니다. 제 신념을 관철하고,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조직폭력배들을 잡아넣기 위해서죠.”
꾸욱.
“그렇게 경찰이 됐지만…… 현실은 그리 쉬운 논리로 돌아가지 않더군요. 실적을 내며 승진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저 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의인이신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 위해 전생에서 경찰이 됐다.
그러나 결국엔 조직의 따까리로 들어가 15년을 진흙탕에서 살다 죽었다.
세상은 정의감 하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솔직히 X, 선생의 흔적을 혼자 추적하던 것도 어쩌면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는 도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뭐라 덧붙이지 않고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저는, 이주혁 씨가 그런 조직을 만든다면 언제든지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몸을 던질 필요까지야…… 하하. 어쨌든, 함께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예.”
박건의 눈빛은 결연했다.
어쩐지 이 정의로운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한데…… 박건도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거다.
“좋습니다.”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박건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럼, 준비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식사나 마저 할까요?”
아직까진 순조로웠다.
‘좋아.’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짓고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
.
.
-다시 모임을 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무슨 안건인지 듣고 싶군요.
호정기획의 사장이자 선생의 추종자, 박광훈의 물음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이런. 안타깝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알 바 아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들을 불러 모아.”
-그렇게 하죠.
박광훈은 순순히 수긍하곤 전화를 끊었다.
은근히 말이 많은 놈이라 더 캐묻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절반, 결제했습니다.”
박건이 다가와 말했다.
“아, 제가 사야 하는데.”
“아닙니다. 공직자인지라.”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박건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볼일이 있다고 하시니 전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다음에 또 뵙죠.”
박건은 처음보단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저벅.
가게 안쪽의 집무실로 향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십니까.”
-네. 계세요.
그에 히죽 웃으며 문을 열었다.
“유나 씨…….”
“오랜만이네요.”
반갑게 인사하려다, 유나 씨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멈칫했다.
“하하……. 요새 자주 못 왔죠?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어요. 일이 바빴겠죠.”
날 힐끗 본 유나 씨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아무래도 기분이 조금 상한 것 같은데…….
요새 자주 나다니다 보니 얼굴 볼 시간이 많이 없었다.
아니, 그것도 사실 핑계지.
잠깐 시간 내서 오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주혁 씨.”
이런 내 생각을 알았는지, 유나 씨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주혁 씨가 뭘 위해서 그렇게 고생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최대한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신경 쓰이게 하지 않으려는 거구요.”
“그게…….”
“제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 상할 거란 생각은 안 하셔도 된단 말이에요.”
유나 씨의 배려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섭섭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엇.”
“대신 틈날 때마다 연락이나 자주 해 줘요.”
“꼭 그렇게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유나 씨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양팔을 내 옆구리에 두르며 내 가슴팍에 머리를 툭 갖다 댔다.
“……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요.”
“……어떤 거요?”
“일이 다 끝나면, 무사히 제 옆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럴게요.”
“무조건요.”
“무조건.”
꽈악.
유나 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맞춰 나도 손을 들던 그때.
똑똑똑.
“언니~ 혹시 주혁이 보셨어요?”
꿈틀.
“하, 잠시만요.”
발랄한 목소리가 산통을 깨 버렸다.
나는 미간을 구긴 채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벌컥!
“언…… 와앗!”
“난 왜 찾아?”
“여기 있었네. 혹시 내가 방해했……나?”
손을 뻗어 강예원의 뻔뻔한 머리통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아주 제대로 방해했지.”
“미, 미안…….”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니……. 난 아직 너랑 사장님이랑 안 만난 줄 알고.”
“오지랖은. 일이나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거든?”
자기가 무슨 큐피트도 아니고, 내가 오기만 하면 유나 씨한테 쪼르르 달려간다.
“맞다, 그 사람 봤어? 외국인 손님.”
“외국인? 아.”
그러고 보니 부장님이 말했었다.
글라자 소속의 정보원을 하나 지하실에 잡아 놨다고.
“들었어.”
“되게 잘생겼더라. 뭐 하는 분이셔?”
“범죄자.”
“어엉?”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러 가라.”
내 핀잔에 강예원이 입술을 모아 움찔움찔했다.
보고만 있어도 열이 뻗치는 움직임이었다.
내가 한 걸음 내딛자 강예원이 후다닥 도망쳤다.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 유나 씨를 돌아봤다.
유나 씨도 얼굴이 붉어진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손부채를 부친 유나 씨가 말했다.
“이제 다시 가셔야 하는 거죠?”
“아뇨. 오늘은 이제 여유로워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고 진짜.”
“알았어요. 그럼 저도 오늘은 휴가를 내야겠네요.”
그 말에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래도 되겠어요?”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유나 씨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일 통으로 휴가를 쓰는 건 어떨까 싶지만, 유나 씨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늘만 짧게 쉬겠다는 거겠지.
“식사하셨어요?”
“아뇨. 아직이요.”
“그럼 밥부터 먹으러 갑시다. 제가 또 괜찮은 곳을 알고 있거든요.”
그 말에 유나 씨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미 식사하셨잖아요?”
“아, 전 별로 안 먹었어요.”
사실 맛있어서 꽤 먹긴 했는데,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갈까요?”
“좋아요.”
나는 유나 씨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먼저 나가 있어요. 직원들한테 얘기하고 올게요.”
“그래요.”
딸랑-
바깥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밝아진 표정의 유나 씨가 나왔다.
저 워커홀릭 유나 씨도 휴가는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와 함께해서 들뜬 건지.
개인적으론 후자였으면 좋겠네.
“한식이 좋아요? 양식이 좋아요? 아니면 일식?”
“자주 먹는 한식 빼고 가요.”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위해 내 차로 이동했다.
나는 두 번째 식사였지만.
* * *
지하의 실험 공간.
그곳으로 내려온 장쉬안은 강화유리로 된 실험실 안에서 머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를 지켜봤다.
“흐으으…….”
정신적으로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한 듯 보였다.
완벽하진 않아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결과였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중년의 박사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원래 저 실험체는 노숙자였습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근육량이 상당히 저조했습니다.”
“그리고.”
“투약 직후에 불안과 통증을 호소하긴 했습니다만, 신체 기능에 문제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또 근육의 활성도가 300% 가까이 증가했으며, 아드레날린이 다량 분비되어 신경계의 반응이 빨라졌습니다. 도파민도 마찬가집니다.”
“통각은?”
“극도로 무뎌졌습니다. 그래서 성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부작용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통각을 느끼는 기관이 크게 손상되었고, 도파민의 분비가 800%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건 거의 필로폰에 가까운 수준이라, 중독성도 그와 근접할 정돕니다.”
박사의 설명에 장쉬안의 입가에 주름이 졌다.
“그럼 성공이로군.”
“부작용을 줄이는 시도를 하긴 하겠지만, 워낙 효과가 극단적인 물건이라 가능할지는…….”
“됐다. 일단 양산부터 하지. 가능하겠나?”
“예. 충분히 제조 가능할 만큼 배합 방법을 정립했습니다.”
장쉬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박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박사. 자네의 노고는 잊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말이야. 원본과 성능의 차이가 있나?”
과학자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던 박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예. 그렇습니다. 원본은 효과가 30% 이상 뛰어나고, 부작용도 지속적인 복용이 있다면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만든 것의 부작용은 어떻지?”
“동일한 물질을 투여하면 생명 연장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추신경계에 입은 손상은 복구할 수 없으며, 결국 3일 이내에 신경계의 기능이 20% 이하로 떨어질 거라고 예상됩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니겠군.”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개선해…….”
“아냐, 아냐. 지금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장쉬안은 축 처진 박사를 격려했다.
“앞으로 이렇게만 하면, 내 비원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 그렇습니까.”
“하루에 얼마나 생산 가능하겠나?”
그 물음에 박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일단은 5개 정도가 한계일 듯싶습니다만, 과정이 숙련되면 10개 이상도 가능합니다.”
박사의 자신감 있는 말을 들은 장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드디어 각성제를 양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선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실험체는 더 데려올 필요 없나?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장쉬안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박사는 그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기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쿵. 쿵.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실험실 안에 있던 남자가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줘……. 더 줘……. 끄륵.”
“맛이 갔군.”
“이성을 놓은 것 같진 않지만,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건 무리인 듯합니다.”
쿵! 쿵! 쿵!
소음이 더 커졌다.
이젠 아예 작정하고 두드리는 탓에 강화유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깨질 일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끄러우실 테니 정리하겠습니다.”
꾸욱.
박사가 노란색의 버튼을 누르자, 실험실 내부에 가스가 사출되었다.
치익-
“크르륵…….”
몇 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
그걸 지켜보던 박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일단 지금은 부작용이 꽤 있어서, 상용화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굳이 기다릴 필요까지야.”
그 말에 박사가 흠칫했다.
“부작용이라…….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릴 것들한테는 의미 없지 않나?”
장쉬안의 입꼬리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지금 바로 사용 가능한 형태로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