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84)
“살아있었네.”
제단에서 몸을 일으킨 예니카 페일로버의 첫 대사였다.
죽었다고 알려진 루시 메이릴이 살아있었다. 그 생존의 확인.
루시 메이릴이 알고 있는 예니카 페일로버라면 조금 더 놀라거나, 상황을 묻거나, 걱정의 말이라도 건넸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 루시 메이릴의 눈앞에 서있는 예니카 페일로버는, 루시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예니카가 아니다. 외관만 보아도 바로 느낌이 왔다.
건조한 말투의 끝에 묻어나오는 차가운 감각이 칼날처럼 벼려져있다.
제단 위에서 루시를 내려다보는 싸늘한 시선에는 예전의 그 동화 같은 따스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운 현실에 오래동안 절여져, 예전의 포근함은 전부 잃고만 모습이다.
아켄섬은 완전히 그녀의 손아귀 아래로 들어가, 이 지옥도의 여왕으로 군림해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 아래로 검붉은 지팡이가 보인다. 세월의 흔적에 많이 낡았지만, 생전의 에드 로스테일러가 쓰던 그 지팡이가 맞다.
유품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 지팡이를 가장 소중한 보물인양 꽉 안고 있는 모습엔, 위화감마저 피어오른다.
“….혹시 살아있진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차가운 말을 쏟아내는 예니카. 그녀의 발언은 루시 입장에서는 의외였다.
이 세계의 루시 메이릴은 사망했다. 로르텔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예니카는 루시의 죽음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켄섬을 성역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뒤로, 아무리 섬을 구석구석 뒤져도 에드의 시체를 찾을 수가 없었어.”
에드 로스테일러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광장에서 린돈파 황실 세력에게 처형 당했다.
그렇다면, 에드 로스테일러의 시체 또한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예니카 페일로버는 그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네가, 에드의 시체를 거두어 간 거지?”
루시는 늘 그렇듯 멍한 눈으로 예니카를 올려다 볼 뿐이다.
“네가 살아있다면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걸. 이렇게 긴 시간동안 내 눈에 띄지 않으면서 섬에 숨어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제서야 예니카 페일로버는 위화감을 느낀다.
루시의 눈에는 단 한 톨의 슬픔도 서려있지 않다. 늘 그렇듯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예니카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에드를 돌려줘. 이 제단을… 에드의 안식처로 쓸 거야.”
“말했잖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 아니야.”
루시는 담담히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허나 예니카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어떨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속해있는 사람도 아니야. 그냥 흘러들어온 것 뿐이야.”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그 제단의 힘이 필요해. 마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어.”
루시의 입장에서는 쉽게 입을 떼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길을 비켜줘.”
“…”
예니카는 나지막이 루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죽음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까이 있었던 예니카였기에 충분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루시 메이릴에게 있어서도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사람은 이 세계만큼이나 소중하고 의미있는 인물이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예니카를 향해 말을 거는 모습.
그녀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잃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깨닫고 말아서, 예니카는 한층 더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아마도 루시가 하고 있는 말은 진실일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루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다.
“…”
루시는 그런 예니카의 모습에 덩달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딘가 망연자실해 보이는 모습.
자신은 에드를 잃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를 빼앗긴 것만 같은데, 눈앞에는 에드를 잃지 않은 루시가 있다.
그녀가 느낄 감정은 무엇일까. 허망함일까, 질투심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시금 샘솟아 오르는 끝없는 슬픔일까.
고개를 든 예니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해져 있었다.
“….그래.”
그렇게, 단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전투까지도 상정했던 루시다. 의외로 흔쾌히 루시를 돌려보내주겠다는 예니카의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루시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허나, 예니카는 외관만 봐도 심상치 않은 상태다. 일단은 경계심을 풀어서 좋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차…
“그거 하나만 알려줘.”
예니카가 제단에서 터벅터벅 걸어내려오며, 속삭이듯 이야기 했다.
바람에 휘날려, 사뿐사뿐 화산재가 흩날리는 제단의 앞에서, 예니카가 슬픈 얼굴로 묻는다.
“거기 에드는 행복했어?”
너무나도 많은 감정을 함축한 단 하나의 질문. 루시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잠시간 고민을 한 끝에, 굳이 구구절절 길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루시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일 뿐이었다.
예니카는 그거면 됐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나가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루시는 모자를 꾹 눌러쓰며 제단 쪽으로 걸어나갔다. 정상의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리고, 여기저기 헤지고 찢어진 옷자락도 휘날렸다.
그 속에서도, 왜소한 몸집을 이끌고 걸어나간다.
이거면 된 것이다. 루시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잘 풀렸다.
이대로 가만히 서있는 예니카를 지나쳐, 갈음의 제단에서 티르칼락스의 유해를 이용해서 외부 세계를 관측해 구조신호를 보내면 된다.
예니카는 루시를 막아서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확인해주었다.
예니카를 지나쳐서 걸어가며, 루시는 잠시간 뒤를 돌아본다.
우중충한 하늘엔 비탄에 빠진 예니카가 만들어놓은 여러겹의 마법진이 겹쳐져있다.
수많은 정령들 사이로 유유히 피어오른 프리데는, 이 섬의 남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지우려 드는 중이다.
그 아득한 배경을 뒤에 두고, 예니카의 뒷모습이 홀로 고독히 서있다.
아무래도 좋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루시는 품속에서 티르칼락스의 유해를 꺼내들었다. 작은 구슬 형태로 된 유물에서 조금씩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력에 동화되는 감각을 느꼈다.
평범한 마법사는 그 편린조차도 감당못할 양의 마력이지만, 루시는 어렵지 않게 그 막대한 양의 마력을 몸에 담아갔다.
갈음의 제단은 티르칼락스의 유해에 담긴 마력을 온전하게 전부 가공해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루시가 원하는 양의 마력 만큼은 흡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몸에 조금씩 흘러넘치는 마력을 계속 느끼며, 루시는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 있는 예니카의 모습은 여전하다.
“네가 부러워.”
등 뒤에 눈이라도 달려있는 것일까.
끝을 맞이해가는 아켄섬의 광경을 앞에 둔 채, 예니카가 새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루시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그 쪽의 에드는 널 기다리고 있겠지.”
“….”
“그러니까, 난 내 할 일을 하는 게 맞아.”
루시는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루시를 이 제단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했다.
그들에게는 되살아온 루시야말로 마지막 희망이었다. 슬픔과 광기에 잡아먹힌 예니카를 어떻게든 수습해줄 수 있을만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럼 뭐 어떻단 말인가.
냉정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루시와는 결국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이대로 떠나는 것이 맞다.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보아도 이게 정답이라고, 루시의 이성이 몇 번이고 속삭여왔다.
루시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지난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준 사람이 있는 곳이다.
그 소년은 루시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가문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로 시작해,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늘 굳건한 표정으로 제 길을 걸었다.
나태한 모습으로 드러누워서, 괜시리 추근덕 거리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삶에 찌들어 루시의 축복받은 재능을 시기하는 일도, 루시에게 필요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일도 없었다.
그 소년은 그저, 루시의 옆에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어주었을 뿐이다.
이렇게 보고 싶어져서 눈을 감으면, 결국 늦은 밤 모닥불을 앞두고 캠프에 앉아 있는 소년의 옆모습이 떠오른다.
늘 그렇듯, 또 다시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장비들을 가다듬던 그 모습이다.
루시가 소년에게 배운 것은 삶에대한 그런 열망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열정이다.
루시는 소년의 그 일관됨과 숭고함을 사랑했다.
허무로부터 도망치기만 했던 루시와는 정반대의 철학을 견지하던 소년, 그 소년의 집념이 루시로 하여금 살게했다.
그렇기에, 루시 본인조차도 알게 모르게… 루시의 가치관은 한없이 덧씌어져 왔다.
평생을 안고 살아왔던 고독이나 허무따위는, 어느샌가 더욱 더 큰 의미를 가진 존재로 대체되어 있었다.
“난 널 이해하지 못하겠지.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듯이 말이야.”
루시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실렸다.
예니카는 그런 루시의 목소리에서 큰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예니카가 루시 메이릴에게 길을 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루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루시는 에드에게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루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마력을 회복해 에드에게로 향하는 길을 트는 것이다.
한정된 마력을 다른 곳에 쏟아부을 여유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루시는 절대로 예니카를 가로막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 루시가 에드에게 품었을 애틋한 마음은 예니카가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루시가 마력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대의 마력을 끌어모아 주변의 정령들을 싹 날려버리는 일이었다.
– 화아아아아악!
– 콰아아아악!
최고위 전격 마법, ‘천벌’.
마력을 일부분 되찾은 루시의 손에서 더더욱 강력해진 그 번개가, 일대의 정령들을 다시금 무로 되돌려버린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마력을 가다듬으며, 루시는 제단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리고 다시금 예니카 앞에 똑바로 선다.
나아가지 않고 돌아왔다. 루시의 선택이었다.
“너어…”
한차례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이 지나가고, 낡고 헤진 옷들을 가다듬으며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대충 보면 알아. 루시. 넌 지금 함부로 마력을 낭비해선 안되는 입장이야. 그런 상태로…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왜 그런 선택을 해?”
돌아본 예니카의 얼굴은… 아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루시를 보내주는 선택은, 예니카 입장에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었다.
에드를 잃지 않은 루시를 바라보며 느꼈을 그 수많은 감정들의 폭풍 속에서도, 끝끝내 자기가 옳다 생각하는 일을 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다.
저 쪽 세계의 에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루시 메이릴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미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루시를 보내주었다.
자신에겐,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루시는 모처럼 회복한 마력을… 돌아가는 데 쓰지 않는다.
돌아온 힘으로, 루시는 예니카를 가로막고 섰다.
“마력이야 어떻게든 다시 회복하면 될 일이야.”
정 여기서 모든 마력이 다 바닥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복구할 수 있다.
불사조 반지의 여파는 평생을 가는 것이 아니다.
몇년이고 버티고 또 버틴다면…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몇 년 정도 가지고 에드가 루시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기에, 지금 당장 본인이 옳다 생각한 것을 관철한다.
예니카는 그런 루시의 결정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현재의 루시 메이릴에게 있어서는, 이런 세계는 끔찍한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서라도 예니카를 가로막는 이유라 함은─
“여기서 나몰라라 도망치는 건, 나한테 삶을 준 사람에 대한 모독이야.”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루시를 이곳에 보내려 했던 자들 또한 한 가득이다.
그 모든 자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살아남는 것.
휘몰아치는 바람의 한 가운데에서,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
예니카의 모습이, 루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던 것처럼.
현재 루시의 모습 또한, 예니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
한 눈에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예니카의 눈에는 그 차이가 명확하게 보인다.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자는 모두 경의 받아 마땅해.”
“너어…”
폭풍 속에서도 소녀의 눈에 빛이 돈다.
공허 뿐이었던 소녀에게 그런 가치관을 물들여놓은 자는 누구인가.
그 왜소한 체구로도 폭풍 속에서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 기억 속 누군가가 겹쳐보이는 것은… 그리움 때문에 일어난 착각일까.
소녀는 받은 것이 많다.
소년에게 삶을 받았고, 살아야할 이유를 받았고, 관철해야할 신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소녀는 비로소 영웅이 된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여파에 이끌려, 오른산을 뒤덮은 화산재가 밤하늘 높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