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85)
– ‘루시’
– ‘혹시 저택을 나가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저택 지붕에 걸터앉아 함께 별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남자의 옆얼굴이 떠오른다.
메이드들로부터 도망쳐서 지붕에 누워 한숨 자고 있던 루시를, 그 남자가 직접 찾아왔던 날이다.
짓궃은 타이밍이다.
하필 이런 시점에 그 때가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루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가 끌어올린 마력을 손에 가득 품은 채 달려드는 순간, 예니카는 재빠르게 지팡이를 움켜쥐며 감응력을 끌어올렸다.
루시와 예니카는 서로의 전투 방식에 대해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니카를 상대로는 절대로 소모전을 해서는 안된다. 지금처럼 루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에 한계가 있다면 더더욱이다.
안그래도 뿜어져나오는 정령들의 군세는 그런 단순 물량전에 특화되어 있는데, 벨브로크의 심장까지 손에 넣은 상태다. 결국 정령들을 소환해내는 예니카 본체를 제압해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루시는 그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예니카 또한, 루시가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 ‘마력을 잃어버린 너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 저택에 너무 묶어놓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말이다.’
– ‘곰곰이 생각해보면, 넌 어딘가 한 곳에 매여있기보다는 하늘을 지붕삼아 이리저리 떠도는 녀석이었지.’
루시의 손에서 뿜어져나오는 고위 폭발 마법 ‘파멸’이 예니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폭발음이 주변을 가득 매우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예니카는 들고 있는 지팡이를 휙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연기가 전부 쓸어내버린다.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린 중위 바람 정령 루덱스가 날개를 편다. 거대한 익룡 형태의 정령 위에 똑바로 올라서 있는 예니카는, 마치 고고한 여왕처럼 보였다.
에드의 지팡이는 예니카와 똑같이 벼락맞은 천년 나무 지팡이를 이용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러나 자잘한 개조나 부여된 정령식의 종류는 완전히 다르다. 에드의 정령술과 예니카의 정령술은 그 결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령술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있는 힘이라면, 모두 예니카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천부적인 정령사는 일단 정령술이라고 하면 그 힘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에드의 정령술을 위해 특화되어 있는 지팡이라 할지라도, 그걸 다루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루시가 다음 마법을 위해 힘을 끌어올리는 순간, 예니카의 머리 위에서 불그스름한 마력더미가 피어오르더니 또 다른 한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큼지막한 박쥐의 날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박쥐 날개는… 보기 끔찍할정도로 여기저기가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정령식 – 폭성.
미리 각인되어 있는 정령식을 중심으로 한차례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이었다.
문제는 그 위력이었다. 예니카의 힘을 거쳐간 그 폭발은, 거의 고위 폭발마법에 준하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폭발의 시작지점은 루시의 발밑이었다.
피어오르는 열기와 이어지는 굉음에 루시의 조막만한 몸이 튕겨져나갔다.
– ‘그냥 요즘, 내가 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한 번씩 예전 생각이 나더라고. 자각이 있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루시 너는 그냥… 삶에 매여있는 느낌이 전혀 없었거든.’
– ‘그냥, 어느 날 훌쩍 사라져버려도 별로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했었어.’
방어마법을 구현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너무 많은 마력을 투자해야만 했다.
필요 이상으로 마력을 사용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마력이 부족하게 되어버린다.
그 압박감이 계속해서 루시의 가슴을 짓누르지만, 예니카의 공세는 멈출 생각이 없다.
제단의 외벽을 기대고 서는 순간, 또 다른 위화감이 루시의 뇌리를 습격한다.
물이 있다.
발목 언저리까지 잠겨있다. 이 곳은 산정상인데도 말이다.
그 순간, 루시의 등 뒤에서 새로운 마력이 피어오른다.
정령식 – 수원발현. 그리고 그 물 안에서 튀어나온 중위 물 정령 레이시아가, 루시의 오른팔을 물어 뜯으려고 아가리를 벌린다.
재빠르게 반응한 루시는 레이시아의 안면에 얼음창 서너발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바람 마법으로 거리를 벌린 뒤, 고위 빛 마법 ‘휘광의 검자루’를 이용해 레이시아의 팔다리를 관통해서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몇 초도 안되는 잠깐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몇 초의 시간을 버는 것 자체가 예니카의 노림수였다.
하늘에는 거대한 크기의 고래가 아켄섬의 상공을 가리며 부유하고 있다.
중위정령들이 벌어들인 시간동안, 그 거대한 고래가 완전히 오른산 쪽으로 몸을 꺾는다.
최고위 물 정령 프리데. 그 고동소리가 한 차례 울려퍼지고, 시야가 오른산의 꼭대기를 향한다.
– 화악!
폭발의 진원지였던 예식용 단검이 허공을 날아 예니카의 손에 쥐어졌다.
한손엔 지팡이, 한손엔 역수로 든 단검.
마치 순례자처럼, 낡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고고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그 뒤로는… 거대한 크기의 고래가 세상을 집어삼킬듯 루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낄 마력을 다 아껴가면서 최고위정령을 상대하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제 아무리 루시라 할지라도, 저 정도 규모의 적을 상대하려면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 몇 년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에드가 없는 이 지옥같은 세계에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며 몇 년이고 다시금 고독을 곱씹어야만 할 것이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루시는 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에드는 루시에게 말했다.
– ‘살아가는 이유 같은 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잔뜩 생길거다. 원래 살다보면 다 그래.’
– ‘그러니, 힘들면 말해라. 네가 나한테 힘이 되어줬던 것처럼, 나도 너한테 힘이 되어주도록 최대한 노력할테니.’
루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온 몸을 휘감은 마력을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전부 발현했다.
몇년 정도 늦더라도, 그 남자라면 계속해서 루시를 찾아 헤매줄 것이다. 그리 확신하고서 자신의 힘을 계속 발휘해낸다.
하늘을 뒤덮은 루시의 마력량은, 전성기의 힘에 비견할만 하다.
한 때 세상을 호령하며 아카데미의 교수진들마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루시의 그 방대한 마력이었다.
순수한 마력량으로 루시를 찍어누를 수 있는 자는, 전설적인 존재인 대현자 실베니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화악!
최고위 폭발 마법 ‘창세의 순간’
악신 메뷸러조차도 퇴각하게 만들었던 태초의 폭발이다.
하늘을 수놓는 마법진의 크기는 마법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비현실적인 규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령의 머리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예니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루시의 결의를 확인한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내가 알던 루시 메이릴과는 역시 많이 다르네.”
아픔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앙다문 채, 힘겨운듯 내뱉는 말.
“이런저런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던 거겠지. 응.”
그 말을 끝으로, 세계는 거대한 섬광에 뒤덮였다.
*
– 콰앙! 콰아아아악!
– 화아아아아아악!
아켄섬의 상공을 뒤덮은 거대한 폭발은 프리데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제 아무리 최고위정령이라 할지라도, 루시가 진심을 내 타격하면 크게 상처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데는 상처입은 와중에도 아켄섬 일대를 마력으로 뒤덮었다.
주변 영해에서 수십개의 소용돌이가 솟아올라 아켄섬의 상공을 뒤덮었고…
프리데를 호위하는 수천 마리의 정령들이 군세처럼 일대를 장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내뿜는 마력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정령들을 쓸어버리며, 상공을 부유하는 예니카를 향해 돌진해간다.
정령 위에 올라탄 예니카는 계속해서 루시와의 거리를 벌린다.
정령사를 제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그 본체를 공격하는 것. 그 대전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루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예니카는 끊임없이 거리를 벌리며 소모전을 유도했다.
루시가 쓸어버리는 정령이 수천 단위가 넘어갈 때 쯤이 되자, 이미 전장은 오른산 꼭대기에서… 실베니아 아카데미 건물이 있는 동쪽 섬으로 넘어와 있었다.
소용돌이 치는 마력의 틈바구니에서 루시는 끊임없이 예니카에게 닿기 위해 나아간다.
그 전투의 여파는… 아켄섬의 모든 곳에서 똑똑히 보였다.
숲 한가운데에 피칠갑이 된 채 누워있는 클레비어스도, 절벽지대에서 기력이 다한 채 쓰러져있던 엘비라도 마찬가지다.
영혼도서관의 입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로르텔도… 눈을 지그시 감고 내부로 들어가고, 생존자 무리들도 양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부디, 살아남을 수 있기를.
그 일관된 바람이야말로, 루시를 움직이게 만든 이유였다.
– 콰앙! 화아아악!
기어이 예니카가 타고 있는 정령에까지 닿은 루시가… 얼음창을 박아넣어버린다.
정령은 그대로 비틀거리면서 밤하늘을 비행하다, 폐허가 되어버린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생활동 쪽으로 추락한다.
– 쾅! 콰가가각! 카가각!
예니카는 얼른 마력을 두르며 착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몇바퀴 흙바닥 위를 굴러야만 했다.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와, 이끼가 잔뜩낀 대리석 바닥만이 가득한 생활동 광장.
중앙에 있는 거대한 분수대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낡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겨우 자세를 가다듬은 예니카가 얼른 지팡이를 다시 집어들려는 순간, 루시의 성위 마법 ‘공간도약’이 발현된다.
코앞에 나타난 루시가 예니카의 지팡이를 발로 차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허억대며 숨을 몰아쉬고는, 예니카를 향해 손을 뻗고 마력을 모았다.
“…”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예니카는 지그시 루시를 올려다 보았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루시는 제 몸을 가누기도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예니카의 반격을 몇 번이나 허용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루시는 예니카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었다.
“왜 안 끝내?”
잠시간 고개를 숙인 예니카가 루시를 향해 물었다.
루시는 만신창이 상태였지만… 차마 예니카를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예니카의 심정이… 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설득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에드를 잃지 않은 루시 메이릴이, 모든 걸 잃은 예니카 페일로버에게 무슨 말을 한들 그녀의 마음에 와닿을 수 있을까.
상투적인 말들을 내뱉을 수야 있다. 이런 걸 죽은 그 사내가 바라지는 않을 거라는 둥, 이런 식으로 날뛰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둥.
그런 정론을 이야기 할 수야 있겠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루시 메이릴 본인도, 에드가 죽은 줄 알았을 땐 학사에서 날뛰어대지 않았는가.
그 고통과 슬픔을 십분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자신의 입장을, 예니카 또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 루시 메이릴이 어떻게 예니카 페일로버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예니카 페일로버를 막으려면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루시는 예니카를 마무리 지을 수가 없다.
“…나 말야, 아직 더 싸울 수 있어.”
그런 루시의 심경을 헤아리는 듯이, 예니카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벨브로크의 심장은 말이야, 정말 무한한 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끝없이 마력을 내뿜어. 한 번 감응하는 데에만 성공하면, 내 몸이 상하는 것만 감당해내면 몇 번이고 최고위정령을 다시 불러낼 수 있어.”
“…”
“지금 지팡이가 내 손에서 떨어져 갔으니, 이게 네게 있어선 마지막 기회야. 남아있는 마력도 거의 없지?”
왜 그런 걸 루시에게 알려준단 말인가.
그런 당연한 의문이 들었지만, 예니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 뜻을 헤아리고 말았다.
망울져 흐르는 눈물이 예니카의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의 예니카에게 있어선, 루시의 존재를 확인하는 매 순간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우흑.. 윽.. 에드가 보고싶어…”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여기서 비탄과 광기를 멈춘다고 하더라도, 예니카에게는 더 이상 뭘 할 의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이게 다 무의미하다고, 그만두라고 말하면… 더 이상 그녀에게 뭐가 남는단 말인가.
결국 한계를 모르고 뛰어나가는 이 질주를 멈추려거든, 누가됐든 힘으로 찍어눌러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예니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루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성위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래도…”
루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힘을내서 말했다.
“그래도, 우린 살아야해.”
무의미하고, 무가치해보이더라도 어떻게든 목숨을 이어가는 것. 그게 루시가 소년에게서 전해받은 신념이었다.
루시의 성위 마력이 예니카를 천천히 감싸고 들어갔다. 예니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하늘을 보았다.
성위마법 ‘시간감옥’
어찌보면, 그것은 죽음을 유예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루시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천천히 예니카의 시간이 멈추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루시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최대한 오랜 시간, 소녀의 죽음을 유예할 수 있도록. 적어도 몇 년 정도는 그녀에게 안식의 시간을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예니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털썩
루시는 기진맥진한 채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한 생활동 광장. 하늘에 구슬프게 떠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긴 잠에 빠진 예니카를 앞에두고 서글픈 얼굴을 했다.
“네가 눈을 떴을 때…”
루시는 속삭이듯 예니카에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살만한 이유가 있는 세상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런… 덧없는 바람만을 남겨둔 채,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누며 일어섰다.
바닥난 마력. 잿빛이 된 세계.
이제부터 루시에게 남은 것은, 긴 기다림 뿐이었다.
언젠가… 불사조반지의 반동이 끝나고 모든 마력이 회복되어, 다시금 에드에게로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게 될 때까지…
저 먼 세계의 건너편에 있는 에드가 포기하지 않고 루시를 찾아 헤매주기를…
그렇게 기도하는 것만이, 루시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였다.
또 다른 마력의 흐름이 광장 바닥에 천천히 퍼져 나갔다.
달빛이 내려오는 폐허. 이끼가 가득 낀 생활동 광장의 분수 위로… 조그마한 인영(人影)이 겹쳐진다.
마치 날쌘 고양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으로 분수대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 소녀의 형상 하나가 보인다.
마치, 예니카가 제압되길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그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이 익다.
광장에서 분수대 꼭대기를 올려다보던 루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사뿐사뿐 불어대는 밤바람에 소녀가 입은 스커트 자락이 휘날린다.
왜소한 몸집으로 거대한 마녀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던 소녀는, 뒤를 돈 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리운 풍경을 다시금 곱씹듯이, 가만히 별하늘을 쳐다보던 소녀는… 나지막이 고개를 돌려 루시 쪽을 내려다 본다.
그 모습이 낯이 익을 수밖에 없다.
헤진 교복. 커다란 마녀모자. 별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백발 머리칼. 푸르스름한 눈동자.
그 멍한 듯한 눈빛은, 너무나도 자신과 닮아있어서.
루시는… 뭐라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 ‘마력이란 상호 작용이 기본이야. 이 쪽 세계에서 백날 마력을 발현해봤자, 저 쪽 세계에서 그 마력을 받아낼 매개체가 없으면 단방향 소통일 뿐이야.’
젤란이 했던 말이었다.
단절된 세계와 세계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본디 마력이란 상호 작용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세계 사이를 건너 뛰려면, 건너편 세계의 누군가가 이쪽을 관측하고 마력을 발현해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충분한 양의 마력과 더불어서, 성위 마법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루시를 이쪽 세계로 끌어들인 자가 누구인지는, 이미 명확해져 있었던 셈이다.
분수대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몸을 돌린 소녀가 입을 연다.
“다, 끝났네.”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다.
이쪽 세계의 루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이런 곳에 자신을 불러냈는지.
결국 무엇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단 하나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의 루시는 마력도 바닥나고 몸도 만신창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저항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어쨌든,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도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보면 되니까.
그러나,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상상이 안된다.
루시의 삶에 있어서 이미 에드란 사내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에드를 잃은 자신이, 생존해있다는 사실조차 숨기며 이 아켄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자신의 죽음을 감추고 있었어야만 했는지.
왜 먼 세계의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내려고 했는지.
그렇게 해서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을지… 아무것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 화아아악
분수대에서 뛰어내려서 착지한 상대를 보며, 루시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경계해야할지 어떨지조차 판단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신은 이미 저항할 수단조차도 없다. 결국, 상대가 뭘 하든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자신 쪽으로 터벅터벅 다가오는 상대를 바라보며, 루시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
코 앞의 소녀가 자신을 한참동안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을 해줬으면 할 정도로… 한참동안 살펴보았다.
같은 루시지만… 서로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에드를 잃지 않은 루시는…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마력을 전부 잃었을지언정…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생명력은, 다른 세계의 자신이 보아도 똑바로 느껴지는 것인지…
이윽고 루시 자신을 닮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 때, 한 번더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루시는 깨닫고 말았다.
이 쪽 세계 루시의 눈빛은, 어디선가 본 듯 했기 때문이다.
이 쪽세계에 넘어오기 전, 다른 사람에게서 그 공허하면서도 텅 빈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아인족을 학살하지 않은 세계선을 관측하고 싶어했던 마법사. 절단자 젤란.
비록, 손에 닿지 않는 허황된… 하늘을 나는 나비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미래라 할지라도…
그런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은 기분이 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저, 그럴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세계의 흐름 어딘가에는 웃고 있는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만으로도…
한줄기 위안삼아 지금의 현실을 살아내고자 하는 그 마법사의 눈이… 겹쳐지고 말아서…
루시는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쪽 세계의 루시는… 그 이상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삶에 대한 의지로 넘쳐나는 루시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는 것인지…
천천히 루시의 품에 와 안겼다.
그리고… 소녀는 천천히 오열했다.
제 삶의 고독과, 거쳐온 시련을 방증하듯 목놓아 울었다.
루시는, 그 소녀의 등을 감싸안아주는 것 밖에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