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전범재판 (3)
정보 제공과 증언의 대가로 독일로부터 호화스러운 삶을 보장받은 그는 기꺼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에 찬성했다.
증인으로 재판장에 나온 그를 보고 소련 전범들은 기함했다.
저자가 여기에 왜 있는 건가?
쿨리크는 분명 중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수척해진 스탈린과 다르게 쿨리크는 그간의 생활이 괜찮았던 모양인지 여전히 후덕한 모습이었다.
그의 대머리에선 윤기가 흘렀고 축 늘어진 턱살은 그가 끼니마다 풍족한 식사를 해왔단 걸 의미했다.
“전쟁 중에 피고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 중에 제 역할은-”
쿨리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탈린은 거의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작 쿨리크는 피고석에 앉은 스탈린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증언을 시작했다.
“전쟁 중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독일 병사들을 학대하고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지시가 있었습니까?”
“저는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허나 당시 전쟁 지도부로부터 그와 관련된 언급이 있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독일인들은 모두 파시스트들이므로 이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 소비에트 연방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공식적으로 포로들에 대한 학대나 학살 명령이 내려진 적은 없지만 그런 방식으로 포로 학대 및 학살 행위를 조장한 것이로군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말을 한 이는 누구였습니까?”
“스탈린 서기장이었습니다.”
“이, 이 역겨운 반역자 새끼! 나라 팔아먹을 매국노 새끼야!!”
참다못한 스탈린이 폭발해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고는 조용히 하시오!”
판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욕설은 계속되었다.
쿨리크가 단순히 거짓말을 해서 화난 게 아니었다.
자신과 소비에트를 배신한 반역자가 뻔뻔하게 증인으로 나온 것도 모자라 작정하고 자신에 대한 거짓 증언을 일삼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저 역겨운 모가지 안 잘리려고 영혼까지 팔아먹는 놈 같으니!”
스탈린이 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러대는 동안 쿨리크는 입을 닫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단지 스탈린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 돼지 새끼야! 파쇼 놈들의 개가 돼서 그렇게 살고 싶냔 말이다! 러시아인의 수치, 쓰레기 같은 개호로 새끼야!”
“입 닥쳐!”
“개돼지 같은 새끼, 개병신 같은 버러지 새끼!”
“경비병! 끌어내!”
욕설을 멈추지 않던 스탈린은 결국 경비병들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퇴장당했다.
***
1944년 11월 22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모스크바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범재판은 미리 작성한 각본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나 처칠, 스탈린, 해리스 등의 전범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부정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들 나름의 논리를 끌고 와서 자신들이 무죄임을 호소했지만, 어차피 재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판결이 바뀔 일은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재판도 후대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일 뿐.
독일과 추축국이 정의고, 전쟁을 일으킨 영국, 소련은 악의 축이라는 사실을 후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쇼.
한 가지 특기(特記)할 만한 사안이라면 재판을 맡은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3국의 판사들이 프라이슬러 이상으로 광분해서 온갖 욕설들을 쏟아내고 고성을 질러대는 통에 재판 과정을 촬영하러 간 레니 리펜슈탈과 스태프들이 소리가 뭉개지지 않도록 녹음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작 프라이슬러는 내 경고를 인식해서인지 평소보다는 얌전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다고 하는데 역시나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디 가지 않는지 30분에 한 번꼴로 쌍욕을 해댔다.
이게 그나마 절제한 거라고 하니 실제론 어느 정도일지 감이 안 잡힌다.
“이걸 사람들에게 공개했다간 역효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녹음본을 본 괴링이 한 말.
흔히 생각하는 엄숙한 분위기의 재판과 달리 온갖 상스러운 욕설과 모욕이 난무하는 게 마치 블랙 코미디 영화를 보는 기분마저 든다.
이걸 그대로 보여줬다간 괴링의 걱정 대로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욕설 장면만 편집해서 보여주면 괜찮을 겁니다. 아무튼, 전쟁을 일으킨 것은 영국과 소련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독일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는 피해자들이고요. 대중들이라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처칠과 스탈린에게 더 큰 분노를 느낄 겁니다.”
“그래, 기껏 촬영까지 해놓고 묻어두기만 하면 뭔가 아쉽지.”
괴벨스의 주장대로 기껏 값비싼 장비까지 들여서 촬영했는데 공개 안 하면 뭣하니 욕하는 장면만 편집해서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이렇게 편집한 필름은 뉴스영화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제목은 심플하게 ‘정의의 심판’으로.
처음에는 모스크바 국제군사재판으로 하려고 했는데 괴벨스가 제목이 너무 딱딱하다며 처럼 하자고 해서 바꿨다.
영국인들과 소련인들이 본다면 이 뭔 개소리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으니, 우리가 정의라면 정의인 거다. 그렇고말고.
2주 전 미국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예상대로 공화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월리스와 민주당은 승전을 들먹이며 나름, 열심히 선거에 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는지 공화당 측 선거인단 432명, 민주당 측 선거인단 99명이라는 처참한 스코어로 대패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대통령 후보 토마스 듀이는 1936년 미국에서 전설적인 위세를 자랑하던 거물 마피아 보스인 러키 루치아노를 구속한 것으로 명성을 떨친 검사로 인기에 힘입어 정치계에 진출, 뉴욕 주지사가 된 양반이다.
실제 역사에선 1944년과 1948년에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루즈벨트와 트루먼에게 패해 결국 꿈에 그리던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그를 매우 싫어해서 사석에서 개새끼라고 욕했고 같은 당 거물인사인 로버트 태프트도 듀이를 멍청한 난쟁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듀이의 실제 성품 자체는 대단히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자부심이 대단해서 타인들에겐 거만한 것으로 비쳐서 문제였지.
이변이 없는 한 듀이는 내년 3월에 미국 대통령 취임이 예정되어 있다.
전쟁 막판에는 그래도 협조적으로 나왔지만, 이전에는 루즈벨트처럼 대놓고 반독 기조를 보였던 월리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그와 반대되는 듀이가 대통령이 됐으니, 미국의 기조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관측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총통 각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월리스보다 나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듀이도 미국인이니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망설임이 없을 걸세. 그래도 우리가 먼저 빌미를 주지 않는 한, 미국도 독일에 먼저 시비를 거는 일은 잘 없겠지.”
듀이가 1944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를 꺾고 대통령이 됐더라면 그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아는 게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듀이는 단 한 번도 대통령이 돼본 적이 없다.
이로 인해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칠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월리스보다는 독일에 조금 더 우호적이진 않을까 기대를 해볼 뿐.
***
유럽에서 영국과 소련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극동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
천황의 녹음방송이 일본 전역에 울려 퍼지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쟁광 몇몇은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 지었다.
배를 갈라 할복하든 총으로 머리를 쏘든 독약을 마시고 죽든 방법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끝에 이르는 결론은 죽음이었다.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열자, 미국도 서둘러 도쿄에서 재판을 열었다.
미군의 열도 진주와 함께 자연스레 신병이 확보된 전범들은 줄줄이 재판장으로 이송되었다.
미국, 영국 망명정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중국,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망명정부, 필리핀에서 선정된 12명의 재판관이 전범들의 심판을 맡았다.
일본과 맞서 싸운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도 재판관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인도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해당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반영 게릴라들이 영국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전쟁도 끝났으니, 인도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어 정국이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인 판사를 재판에 참여시킨다면 인도의 독립을 용인한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며 영국 망명정부에선 단호히 반대했고, 대독 강화건 및 독일의 대일전 참전 문제로 영국 망명정부로부터 푸짐한 욕을 얻어먹은 미국도 영국을 달래기 위해 해당 주장을 받아들여 인도를 재판에서 배제했다.
재판장에 끌려 나온 피고들은 황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판사와 검사, 매의 눈으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미 육군 헌병들을 둘러보았다.
한때 일본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이제는 포로 신세가 되어 피고석에 앉아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핵의 열기로 폐허가 되었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떨어지지 않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된 관동군 병사들이 시베리아에서 10년이나 중노동을 하는 일도 없고, 쿠릴 열도도 유지하게 된 관계로 일본은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놀랄 만큼 괜찮은 조건으로 종전하게 되었지만,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듯이 이후의 과정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전후 연합군의 처벌에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소련과의 냉전에 대한 대비 차원이었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소련이 독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냉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다르지 않았지만, 냉전의 주 무대에서 극동이 한참 뒤로 밀렸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독일이 중원에 계속 주둔하며 극동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것에 주력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독일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련 없이 중국에서 철군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극동이 냉전의 한복판이 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고 자연스레 일본 전범들에 대한 재판 역시 냉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다.
유럽에서의 패배를 일본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가리고자 열심히 노력 중인 미국에는 이 전범재판을 독일이 하는 것 이상으로 크고 철저하게 하여 국민의 울분을 해소하고 세계의 관심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이 정의와 도덕성을 이유로 재판을 열었으니 미국은 더욱 엄격한 잣대를 일본에 들이밀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이 독일보다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라는 것을 세계가 알 수 있다.
동시에 소련 견제를 위해 일본을 사냥개로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공산권의 아시아-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려면 지정학적으로 일본은 대단히 중요했지만, 유럽에 있는 독일을 상대하는데 일본은 딱히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심판은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의 주범이자 전쟁 기간 내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실무자 수십 명에게 사형 판결이 떨어졌다.
“피고는 침략전쟁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을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연합함대사령장관을 역임하고 진주만 기습을 계획, 성공시킨 야마모토 이소로쿠 또한 피고 신분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부건빌 기지로 시찰을 나갔던 야마모토는 미군 P-38 라이트닝 편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가 탑승한 1식 육상공격기는 적의 공격을 받아 불시착했지만, 야마모토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중상을 입은 그는 후송되어 수술받았고 일본으로 보내져 요양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이들과 다르게 야마모토는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덤덤한 태도로 검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처음 미국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해오다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미개전을 계속 반대하다간 이에 불만을 품은 육군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저, 저놈이-!”
“이 더러운 매국노가!”
야마모토의 발언에 발끈한 육군 인사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들고 일어섰지만, 헌병들의 제지를 받고 금방 잠잠해졌다. 야마모토의 발언은 계속되었다.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수천 명의 미국인을 사상케 한 책임은 오직 저의 몫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후에는 일미 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주장해왔으며 전쟁의 조속한 종결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독일에 억류되어 있던 도고 시게노리도 미국 측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송환되어 재판에 섰다. 물론 독일이 도고를 순순히 내준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도고도 독일의 포로이니, 이쪽에서 재판하려고 하는데…….”
“거, 여기까지 와서 이러깁니까?”
“쉽게 쉽게 갑시다. 얼마면 되겠소?”
독일이 뭘 원하는지 빠르게 캐치한 미국은 대일전에 참가한 것에 대한 추가 보상 명목으로 독일에 추가로 비용을 지불했다.
그렇게 도고를 넘겨받은 미국은 도고를 바로 재판에 회부했다. 도고 역시 야마모토처럼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변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피고는 진주만 공습 직전까지 거짓 협상을 벌여 미국을 기만한 것을 인정합니까?”
“제가 미국과의 협상을 벌인 이유는 미국을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국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일본의 파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습니까? 저는 그때도 지금도 미국과의 평화협상이 체결되지 못한 것이 통탄스럽습니다.”
도조 히데키처럼 죄가 명확해 사형 말고는 답이 없는 인물들과 야마모토나 도고 같은 사례는 연합국 입장에서도 난처했다.
사형을 시키자니 일방적인 보복으로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처벌을 낮추자니 당한 게 워낙에 컸다. 하지만 진짜 처치 곤란한 사례는 따로 있었다.
일본의 살아있는 신
천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