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371)
제371화. 에필로그(Epilogue)
–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간다 (1)
광풍처럼 전 대륙을 휩쓸었던 신성제국과의 전쟁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신성제국의 몬스터들을 앞세운 강력한 군대 앞에 중부 전선의 파데론 공작이 장렬히 산화하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 대륙인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제국의 전력 앞에, 연맹의 영토는 제국군의 군홧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힐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이 일으킨 전쟁의 결과는, 대륙의 모든 이들이 예상한 것과 정반대로 엄청난 대승을 거두며 끝을 맺었다.
그것도 동부, 중부, 서부를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말이다.
물론 그 가운데 연맹의 희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뇌명검(雷鳴劍), 브라움 반 드미트리 공작.
이케니아 왕국을 굳건하게 떠받치던 두 기둥 중 하나인 검가의 주인이, 서부 전선에서 신성제국의 카밀 공작과 함께 양패구상하며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나라를 떠나 연맹으로서도 실로 뼈아픈 결과가 아닐 수 없었지만, 연맹의 몇몇 지배층들은 이 결과에 내심 안도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케니아 왕국의 전력은 가뜩이나 강성해질 대로 강성해진 상태였다.
원래도 제국의 4할에 달하는 전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연맹의 맹주였던 이케니아 왕국이다.
하물며 새롭게 옥좌에 오른 제롬에, 군도와 엘프들과의 연대까지.
이미 포화상태라 보아도 무방한 이케니아 왕국의 국력에 옥좌에 오른 무인들까지 모두 건재했다면, 이케니아 왕국이 제2의 신성제국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물론, 전혀 의미 없는 견제이자 우려였지만 말이다.
엘프나 군도의 세력은 물론이요, 동부 전선에서 오시리스 왕국을 도운 흑사자들의 정점, 백익 람팡이나 드래곤 산맥의 몬스터들도 이케니아 왕국의 핵심인 제롬과 연이 깊은 상태였다.
게다가 연맹 대부분의 왕가는 제롬이 있는 이케니아 왕국에 매우 호의적이었기에, 나쁜 마음을 먹고자 했다면 이미 이케니아 왕국은 제국을 자처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류를 읽지 못한 몇몇 귀족들은, 연맹의 대승 속에서 이케니아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오고자 전쟁 내내 모습을 감추었던 제롬을 헐뜯으려 했다.
-연맹의 큰 별인 브라움 공작과 파데론 공작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는 동안, 제롬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는, 졸렬한 트집을 잡으며 말이다.
그렇게 여론을 호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입을 꿰매버리는 일이 밝혀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선과 거리가 있던 제국의 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성제국에서는 어떻게든 바티칸에서 있었던 일을 은폐하려 했지만, 그만한 대사건이 어디 숨긴다고 숨겨질 만한 일이던가.
-신성제국의 젊은 황제가, 제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선대 황제를 폐위하고, 대륙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패기만만한 불세출의 재녀.
제국의 구심점으로 자리했던 황제, 이바렐라 폰 헤카론을 쓰러뜨려 종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제롬이라는 사실이 온 대륙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졸지에 머리를 잃은 제국은 선황, 베드로 폰 헤카론 3세를 다시금 복위토록 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옥좌, 교황 리비아를 회군케 하여 내부를 수습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연맹의 대륙인들은 열광했다.
예상과 달리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제국에 남은 대부분의 옥좌가 전선에서 그 목숨을 잃었다.
물론 마르지 않는 신성력을 보유한 리비아는 실로 위협적인 적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리비아를 받쳐줄 수 있는 강대한 무인이 존재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은 세 공작과 이바렐라 모두가 쓰러져 제국의 전력에 거대한 공백이 생긴 상태.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연맹이 제국의 영토를 빼앗고, 그들의 영향력을 지워낼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부 전선, 그리고 동부 전선은 곧장 군을 정비하여 북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승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케니아와 반텐은, 제국과 대치하던 평야와 몇몇 북부 영지를 빼앗은 것을 끝으로 발리스타까지 진격하지 않았다.
대륙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이케니아의 전력이라면, 제국의 수많은 영토들을 그대로 집어삼킬 수도 있었건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진격을 멈추었다.
-이케니아는 이미 그 국력이 충분하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내서 연맹의 의심을 받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사로운 욕심보다, 연맹의 조화를 우선시하겠다. 실로 연맹의 진정한 맹주다운 품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유일 뿐.
대륙인들이 어찌 알겠는가.
발리스타를 차지하여 제국 북부를 차지할 이들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처어억!
거대한 요새, 발리스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언덕의 가장 앞에 위치한 붉은 늑대를 필두로, 은빛의 늑대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블러드 울프의 등에 올라탄 오크는 평범한 오크들과는 전혀 다른 주황빛의 피부를 띄고 있었다.
스르륵!
오크 로드, 하탄이 등에 걸친 거대한 도끼를 풀어 햇살에 비추었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띤 도끼는 얼마 전 큰 전쟁을 겪었음에도, 조그마한 이 하나조차 나가지 않았다.
도끼를 점검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하탄이 외쳤다.
“취이익! 드디어, 때가 되었다!”
하탄을 품기에는 너무나 좁디좁은 드래곤 산맥을 넘어, 인간들의 영역을 향해 나아갈 때가 말이다.
하탄이 키클롭스들의 영역, 가이아에서 아르게스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모두 인간들의 영토를 향해 진격하고자 했던 신념에서 부딪쳤던 사건이지 않았던가.
당시, 제롬은 말했었다.
함께, 신성제국을 정벌하자고.
자신은 제롬에게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얼마 전 발리스타의 바로 아래 평야까지 치고 올라온 제롬의 가문, 반텐은 수많은 무구들과 식량을 보내왔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는 자신의 단물만 쏙 빨아먹고 뒤로 빠졌다고, 비겁한 이들이라고 욕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하탄은 알고 있었다.
‘취익! 인간들 눈치보지 말고 마음껏 날뛰라는 소리겠지.’
그간, 제롬과의 막고라를 통해 새겨진 금제 속에서 오크들은 참으로 오랜 시간 인내해왔다.
그 억눌린 본성과 욕망을 마음껏 펼치라는 제롬의 배려이리라.
쿠우웅!
하탄을 태운 붉은 늑대, 블러드 울프가 커다란 앞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취이익! 오늘, 우리는 드래곤 산맥 바깥의 세상을 정벌할 것이다.”
하탄의 담담한 선언을 시작으로.
“취이이이이이이익!!”
도열해있던 오크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그 가장 선두에, 하탄이 위치하고 있었다.
“흐으읍!”
콰아아아아아앙!
하탄의 무지막지한 도끼에 서린 진동의 힘에, 발리스타의 단단한 요새 외벽에 쩌억하고 금이 갔다.
‘취이익! 나는, 선조들의 위대한 영역에 나아갈 위업을 달성할 것이다!’
이 요새는 시작에 불과했다.
종족을 위한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종족의 진정한 왕으로서 군림하게 되는 날에는.
다시금, 제롬과 막고라를 펼칠 것이다.
인간들의 굳건한 영웅으로 자리잡은 제롬과, 오크들의 역사에 남을 왕이 될 자신.
실로, 발할라의 선조들에게 보일 완벽한 무대이지 않은가.
그 종착점을 상상하며 웃은 하탄의 도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발리스타를 시작으로 훗날 북방의 드넓은 영토를 정벌한 대군주, 하탄.
굴복하거나 물러난 자에게는 자비를, 반항한 자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을 내린 오크들의 전설이 마침내 대륙의 역사에 새겨지는 첫 순간이었다.
* * *
푸화아아아아악!
오시리스 왕국의 연무장.
뜨거운 열기를 품은 불과 그 불꽃을 마주한 바람이 얽히고설키며 더욱 더 강한 열기를 주변으로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센 불꽃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는지, 바람이 천천히 사그라지며 연무장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고고, 아직 형님한테는 멀었나 봅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은 아직 어린 티도 채 지우지 못했지만, 그 눈빛에는 나이와 달리 성숙한 깨달음이 감돌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늘었으면서 그런 소리하면 욕먹는다, 파록. 청풍의 운용이 엄청나게 부드러워졌어. 나도 이제 설렁설렁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세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파록에게 손을 내밀자.
“아이고, 봐주십쇼.”
파록이 씩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과거의 소심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파록이었다.
연무장의 위.
바그다드 왕과 불칸 후작, 그리고 이슈바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젊은이의 훈훈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흘흘! 반목을 거듭하던 두 가문의 젊은이들이 화합하여 서로를 독려하니, 참으로 보기가 좋구나. 오시리스 왕국의 내일은 밝을 것이야.”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슈바르 님.”
불칸 후작이 이슈바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바그다드 왕 역시 같은 마음이리라.
“그에게는 정말로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졌군.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런지….”
“흘흘흘, 바그다드여. 뭘 그런 것을 걱정하는가.”
이슈바르가 바그다드 왕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네. 물질적인 것으로 이 은혜를 갚을 수는 없는 일이지.”
“하면…?”
“그 아이가 언제나 원하던 대륙의 평화. 그 아이의 꿈을 위해, 계속해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며 그 길을 함께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일세.”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스으윽!
그들의 눈이 수련을 마친 연무장의 세트와 파록에게 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친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을 더욱 열심히 성장시켜야겠군요. 제롬, 그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부르르르르르르!
오시리스 왕국의 두 내일은, 어째서인지 등줄기에 밀려오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사각, 사각!
서류를 넘기고, 중요한 부분은 포인트를 잡아가며 꼼꼼하게 기안을 확인한다.
“…흐으음.”
이내 서류 내용의 모든 검토가 끝났는지, 남자는 펜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인장을 들어 올렸다.
쿠우웅!
마지막 서류에 인장을 찍어 승인한 남자, 아레스가 의자에 몸을 기울이며 쭉 기지개를 켰다.
반텐의 일을 맡은 후, 처음으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일과를 마친 것이다.
“끄응! 이것도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는군.”
언제부터일까.
어느 순간부터, 검보다 펜과 도장이 더 익숙해진 아레스였다.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자랑했지만, 과거보다 배에 군살이 생긴 것을 바라본 아레스가 피식하고 잇었다.
“정말이지 뭐에 씌였던 모양이야. 뭐 좋은 거라고 이 자리에 그렇게 앉고 싶어 했는지 원.”
그냥 앉고 싶은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암투도 불사할 정도로 오랜 세월 원하던 자리였다.
이 자리에 앉기 위해, 동생들과 소리 없는 경쟁을 이어오며 보내온 세월이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막내의 기지로 배신자를 붙잡고 차지한 이 자리의 현실은, 상상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따분하고, 고려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끼이익!
아레스의 질문에 맞추어 집무실의 문을 열고 갑옷을 걸친 여인이 천천히 들어왔다.
“뭐에요, 오라버니. 농땡이 중?”
“너는 그놈의 말본새 좀…하, 아니다. 이제 영주가 될 사람이니, 네가 알아서 하겠지.”
여전히 귀족답지 않은 어투에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아레스는 이내 그만두고 찌푸렸던 미간을 애써 폈다.
“…농땡이가 아니라, 네 배웅을 위해 서둘러서 일을 끝낸 거다. 오라비의 마음을 그리도 모르겠느냐.”
“뭐야, 그런 거였어요? 난 또. 내 핑계로 일 팽개치고 놀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이럴 때만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서는.
“이제 가는 거냐?”
내심을 감추며 아레스가 되묻자, 메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드라 궁에서 정식으로 임명장이 도착했어요. 이제는 가봐야지. 영지도 빨리 안정화시키려면 말이에요.”
메르시는 자신을 따르는 바람의 마법사, 카미트와 배신자 다르칸의 뒤를 이어 새로이 단장이 된 드락사르와 함께 새로이 병탄하여 넓어진 제국의 영지 중 일부를 불하받았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제국의 영토를 향해 진격하겠다던 제롬과의 약속대로, 메르시는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당당하게 선봉으로 진격했었다.
그 공에 대한 보상을 쟁취해낸 것이다.
스스로의 손으로 말이다.
“그럼, 이제 갈게요. 오라버니한테 뒤지지 않는 멋진 영지로 꾸며낼 테니까, 두고 봐요.”
“아버님 얼굴은 뵙지 않고 가는 게냐?”
“뭘,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아버님, 오랜만에 친구네 고향에 놀러가셨잖아요. 친구 보러 간 부모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라. 어머님 뵈었으니 됐죠, 뭘.”
“뭐, 그것도 그렇구나.”
바쿠스가 떠난 장소를 알기에, 아레스는 메르시의 의견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진짜 가요, 오라버니. 다음에 보자고요. 그때는, 영주 대 영주로.”
스윽!
가볍게 내민 메르시의 주먹을 보며 아레스가 가볍게 주먹을 마주했다.
툭!
“…그래, 그렇게 하자.”
“그리고, 다음에는 뱃살도 좀 빼고. 오라버니 조금 아저씨 같아.”
“…….”
못된 것.
아레스는 집무실의 창문 사이로 떠나가는 메르시와 일행을 지켜보며 막내를 떠올렸다.
반텐의 세 남매가, 모두 자신의 영지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과연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만큼 대단한 놈이다, 너는.”
떠나간 동생과, 이 자리에 없는 동생을 떠올린 아레스는 벽에 세워둔 검을 잡았다.
“맨손으로 고생하며 모든 것을 일군 동생들도 있는데, 다 물려받은 내가 투덜대서야 체면이 서질 않겠지.”
명색이 장남인데, 주어진 영지와 제 몸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야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래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
* * *
검가의 영지, 콘월.
콘월에는 그 어디보다도 화려하고 기품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공동묘지였다.
고작해야 평범한 묘지를 뭐 그리 관리 하냐 말할 지도 모르지만, 그 묘지에 묻히는 이들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대로 검가의 영주로서 콘월을, 이케니아를 빛낸 위인들이 잠드는 성지.
그 성지에, 최근에 세워진 듯한 깨끗한 묘비가 있었다.
-브라움 반 드미트리, 대전(大戰)의 끝에 제국의 빛을 베고 이 자리에 잠들다.
생전에 세운 대위업이 새겨진 묘비 앞, 장대한 체격을 가진 한 남자가 한참 동안 그 앞에 묵묵히 서있었다.
“…….”
마음의 대화를 마친 것일까. 남자는 품 안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퐁!
향긋한 향이 묘비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작년에 햇빛을 잔뜩 머금어 놀라운 당도를 자랑하는 필라도르의 포도 중에서도, 최상품만을 엄선하여 빚어낸 질 좋은 와인.
비싸다면 비싼 와인이었지만, 안식에 든 브라움이 생전에 마시던 술에 비하면 숙성되지 않은 서민의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콸, 콸, 콸!
남자, 바쿠스는 브라움의 무덤 위로 와인을 연거푸 들이부었다.
“필라도르 왕국에서 이제 막 출하를 시작한 와인이라더군. 자네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술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브라움이 아니었다면, 서부 전선에서 바쿠스 홀로는 결코 제국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무슨 복인지, 내 자식들은 이제 장성해서 제 앞길을 잘 찾아가고 있네. 당분간 내가 자리를 비워도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빅토르는 아니야.”
비록 근래 들어 많이 성숙한 모습을 보였지만, 급작스럽게 아비의 부고를 맞이한 탓에 아직까지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내가 자네에게 진 빚을 어찌 갚을지 고민을 해보았지만, 내 머리로는 하나밖에는 떠오르지 않더군.”
자신의 가문과 영토를 지키다가 전사한 벗이다.
“빅토르가 검가의 진정한 주인으로 우뚝 설 때까지, 내가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겠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나서야만 할 때였다.
“그 정도면, 자네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지?”
우르르르릉!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하늘은 그저 맑고 푸르를 뿐이었다.
“이 친구 참… 만족했으면 곱게 좀 이야기할 것이지.”
피식 웃은 바쿠스는, 그렇게 오래도록 브라움의 묘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